2022년 11월 20일 주일예배
[한 사람의 소중함을 보여주시다: 마 8장 28-3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현대 사회에서 숫자는 가치를 나타내는 척도로 인식됩니다. 만인이 숫자로 가치가 매겨지고 그에 따라 대우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수치의 합리성’으로 인해서입니다. 이런 흐름 가운데 교회를 구성하는 숫자는 그 교회의 가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몇 명의 숫자를 동원하는가는 그 사람의 능력과 직결된 수치입니다. 그래서 그 수에 따라 성공했다.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 속에서 한 개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말 관심이 있는 것은 한 영혼 자체가 아니라 한 영혼들이 모인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존엄성이 회복된다면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불행한 일들이 반복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바로 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되고 교회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태는 한 사람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거친 풍랑을 뚫고 가라다 지방으로 가셨던 하나의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거센 풍랑을 잠잠하게 만드신 예수님 때문에 배는 안전하게 갈릴리 건너편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가다라” 지방으로 우리에겐 거라사로 더 익숙한 곳입니다. 가다라는 갈릴리 동남쪽에 있는 주로 이방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어쨌든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온 곳이라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며 온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기대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시고 기적을 일으킬 것에 그래서 예수님이 더욱 칭송받으실 것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기대를 하고 마을로 들어갈 때 급작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귀신 들린 두 사람이 뛰쳐나와 예수님과 제자들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풍랑에 놀라 가뜩이나 위축되어 있던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들은 몹시 사나운 자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이들이 군대 귀신에 들려있다고 하였습니다. 군대를 뜻하는 “레기온”은 군단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한 군단은 대략 6천 명의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렇게 수많은 귀신에 사로잡혀 있으니 그들의 상황이 비참했던 겁니다.
두 사람은 벌거벗은 채,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돌로 제 몸을 자해하기도 하면서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고 심지어 그들 자신도 스스로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겐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귀신에 사로잡혀 비참하게 파괴된 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파괴는 사탄의 특성입니다.
아마 마을의 사람들도 이들이 어떤 해를 입힐지 모르기에 이들이 있던 무덤길로 지나가기를 꺼렸을 겁니다. 그런데 한 무리가 자기들에게 다가오니까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예수님 일행을 겁주어 쫓아버리려고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제자들도 놀라워했지만, 귀신 들린 두 사람도 이들을 위협하고자 뛰쳐나왔다가 더 놀랍니다. 예수님을 본 거예요. 그들보다는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들이 즉각적으로 깨달았던 겁니다. “아이코, 큰일 났다.” 순간 돌변하여 귀신 들린 자들이 자기들을 방어하기에 급급해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자기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아직 자기들이 물러날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이들의 말속에서 우리는 굉장한 사실을 듣게 됩니다. 마 8장 27절에서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답이 뜻밖의 존재에게서 나왔습니다. 바로 귀신 들린 두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고백은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더 이상 맞설 수 없고, 결국은 예수님에 의해 쫓겨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단지 그다음 자신들이 활동할 거처에 관해 예수님과 협상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된 말일 뿐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던진 말입니다. 어쨌든 이들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듣게 됩니다.
귀신들은 더 이상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 간청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돼지 떼가 방목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에게 “가라” 명하셨습니다. 순간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돼지 떼가 놀라 미친 듯이 바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귀신 들린 두 사람은 귀신이 나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러나 군대 귀신에 들린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 전부 죽었습니다. 돼지들은 이 지역 사람들의 생계 수단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돼지들을 죽게 한 것은 재정적으로 무책임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은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사람들의 안위를 위한 수단보다는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사탄과 귀신들의 절대적인 목표와 그로 인한 극악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의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파괴요, 죽음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려 몹시 파괴적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서 악의 세력들을 물리침으로써 그들을 살리셨고, 평안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한 생명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로 오시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샬롬을 이루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가다라 지방의 많은 자들이 두려움에 빠진 겁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뭘까요? 이들은 귀신을 축출한 예수님을 주목하여 이 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이웃이 군대 귀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치유 받고 멀쩡하게 된 것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이 일로 인해 닥친 현실만을 보았던 겁니다. 예수님을 오로지 위협 요소로만 보았던 거예요.
실은 예수님의 권위에 직면한 모든 사람이 그분에 대한 믿음과 충성으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왔다가 그를 따르는 것이 도리어 안락한 삶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 만 보았거나,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 자신들의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관계를 위협한다는 것에 주목하거나
자신들의 일상에 예수님을 모시게 된다면 세상의 권세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으로 인해 그들의 삶에 닥쳐올 손해를 두려워하는 것 등에서 기인한다고 봐요. 여러 이유로 인해 주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손해를 보거나 희생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인 거죠.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의 청을 받아들여 왜 애꿎은 돼지들을 죽게 했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이 치료받은 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본 것과 앞으로 손해 볼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커지다 보니까 예수님께 떠나가기를 간구하였던 겁니다. 몇 사람 더 예수님이 치료해주시면 가다라 지방이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가다라 지방의 무리는 오늘 이 사회의 구조 악을 보여줍니다.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피해를 보는 이들을 돌아보지도, 그 환경을 개선하지도 않는 모습이어서입니다. 한 사람을 자기 이익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면 어떻게 산업현장에 매일같이 안전사고로 인해 근로자들이 죽어 나가겠습니까?
하늘에서 바라보는 한 사람 생명의 가치는 값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혹시 가다라 사람들처럼 돈이 되는 수많은 돼지 떼를 아까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바로 이웃보다 값비싼 돼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무리의 탐욕입니다. 탐욕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 시켜 귀신도 고백했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들 뿐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무리의 탐욕과 예수님 앞에서 드러난 그들의 불안감은 이들도 사실상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질긴 것인지,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만이 끊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거절했으니 어떻게 자유 할 수 있겠어요? 끊임없이 억압의 구조 안에 갇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 앞에 온전한 제자도를 세워가지 못하여, 여전히 세상 유익에 마음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자들은 그 어떤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자신의 것을 잃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려면 우리가 부여잡고 있는 것들을 놓아야 하고, 타자에게로 시선이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들리고 보이게 되고 그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참된 제자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무리가 간곡하게 떠날 것을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은 곧바로 배에 올라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보다는 오히려 치유로 인해서 발생한 손실을 바라보는 무리에게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더는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 한 생명을 구원하셨기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흔쾌히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이 땅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고,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승리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다라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 사역의 초점은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혼돈과 파괴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회복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악의 세력과 싸움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과 연합함으로써 대적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능력의 실체를 접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적절한 반응은 조건 없는 신뢰와 충성이어야 합니다. 위험과 대가를 걱정하지 말고, 그 앞에 서야 그분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가 됩니다.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처럼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한 사람의 소중함이 아닌 자기 이익에 목을 매고 산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는 어리석은 길이 될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외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유대 사회는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아니오”라고 말씀하셨고,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심으로 그 반대편에서 행하셨던 겁니다. 이처럼 집단 구조 악 속에 갇혀 있던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오늘 어두움의 권세 가운데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안에 무너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처럼 오늘 우리 사회도 여전히 한 사람의 소중함이 철저히 외면받는 수치의 합리성이라는 깊은 늪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한 사람의 소중함을 돌아보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타자에게로 돌려 또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나아갑시다. 한 사람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일 때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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