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1일 주일예배설교문
[주린 자와 배부른 자: 눅 6장 20-26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가난하다.” “주리다.” “슬퍼하다.” “핍박당하다.” “소외당하다.” 이 어떤 말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행복을 말해주는 말들은 아닙니다.
대게 사람들은 가난한 자보다는 부요한 자, 주린 자보다는 배부른 자, 우는 자가 아닌 즐거워하는 자, 핍박당하는 자가 아닌 평안한 자가 되기를 좋아합니다.
헌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상식적인 바람과는 다른, 저 반대편의 상황에 있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지금 주린 자가 복이 있고, 우는 자가 복이 있고, 주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솔직히 피부적으로 와 닫습니까? 아니면 위로가 됩니까? 자신의 상황에 따라 편차가 클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들을 향하여는 예수님께서 화가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완전히 역설적인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믿고 사는 동안 부요해도, 배불러도, 웃어도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까? 늘 눈물 질질 짜고 살아야 하고, 우리 삶에서 웃음소리가 사라져가야 하는 것입니까? 오직 주를 위해 핍박만 받아야 할까요? 참 쉽게 아멘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을 하신 걸까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기존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시고 평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이신데,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진정 이 땅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추구해야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부여잡고 나아가야 하는 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아닌 세상의 가치에 함몰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당하는 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하루 먹기도 힘들어 하고,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눈물 흘리는 비탄한 자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걸까요? 단순히 문자적인 해석보다는, 어떤 이들은 사회학적 해석만으로 접근해 들어가기도 하는데, 너무 일방향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그 당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정황과 하나님 나라의 틀에서 이 말씀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프란체스코로 대변되는 탁발수도회처럼 다 버리고 구걸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는 스스로 주님을 위해 고행의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전에 사막에 들어가 고행하는 수도사들처럼 말입니다.
저는 그런 문자적인 의미들보다는, 사회학적인 접근보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들의 모습 속에서 여전히 아프고, 채워지지 않아 채움과 회복, 그리고 평화에 대한 갈망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되요.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에 의해서 수여되는 모든 포괄적인 축복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린 자는 저들이 배부를 것이기에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공급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는 자는 저들이 웃게 될 것이기에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위로는 우리를 웃게 할 수 없습니다.
주를 의해 핍박당하는 자들은 하늘에서 저들의 상이 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핍박당하는 그 날에 받을 상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가난하고, 핍절하며 굶주리고 슬픈 자들입니다. 현세와 그 안에서의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임을 드러낸 자들입니다.
반면에 부요한 자들, 배부른 자들, 웃는 자들, 칭찬받는 자들은 왜 화가 있다고 하신 걸까요? 이들은 현세가 제공할 수 있는 것, 물질에 대한 욕망의 만족과 세상의 행복과 명성을 다 가졌습니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도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부자들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같다가도 지금 자기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때가 올 것을 알고 있을까요?
결국은 이것을 종합해보면 두 부류의 사람, 즉 주린 자와 배부른 자의 두 모습으로 정리가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갈급한 자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인가에 따라 하나님은 복과 화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서려고 하는 자는 결국 무너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늘 주께 붙어 있어 동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하심 가운데 그들의 삶이 세워져 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이 무엇을 따라가는 지 점검해야 합니다. 세상의 부요함에 취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부요함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소유하고 살아갈 것인지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고 하늘의 위로를 바라며 주를 위해 헌신하면 그만큼 세상적인 가치 기준에서 볼 때 부족해보일 것이지만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함으로 살아가기를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세상 만족함으로 하나님 떠난 삶은 당장의 유익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 끝은 화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갈급하고 주린 영혼을 채워주시는 주님과 함께 가십시오. 채움과 회복, 그리고 위로의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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