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4일 주일설교본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입니까? 사 1장 10-2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교회는 예배로 시작해서 예배로 끝나는 공동체입니다. 주일에도, 새벽에도,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가정 심방을 가도, 구역에서 모여도, 모였다하면 예배부터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 저 사람들은 바쁜데 허구한 날 모여 뭣들 하나 의아해 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주님 재림 하신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오직 예배만 있을 겁니다. 모든 것이 예배라? 좀 끔찍하게 여겨집니까? 이렇게 교회는 모였다하면 왜 먼저 예배부터 드릴까요? 그것은 예배가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해 부름 받았고 예배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바로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던 이스라엘을 구하여 불러내실 때도 그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일, 즉 예배를 위해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즐겁고 기쁘고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 안에 감동과 기쁨이 있지만 그것이 제일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예배는 교회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수단도 아닙니다. 오직 모든 예배의 초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허락하신 창조와 구속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초점은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광휘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드린 예배의 결과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합니다.
헌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1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예배를 가증이 여기셨습니다.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예배의 문제는 그들이 드리는 제물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배자로서의 삶이 그들의 예배를 방해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13절b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 거룩하게 나아와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여전히 거룩함으로 구별되어 살아가지 않고 악의 자리에 있는 것을 하나님은 참지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롬 12:1의 말씀에서처럼 삶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삶이 되는 일치가 아니라 삶과 예배가 격리된 위선적 삶의 열매를 가지고 나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견디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사제도의 시행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의 제물이 아니라 제사를 통해 회복되고 성화되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 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 예배에 나와서 자신의 삶을 산 제물로 드리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살피고 경건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보다는 오늘 뭔가 좋은 말씀 듣고, 자기 소원을 올려드리는 시간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의 죄를 예배드리는 행위로써 퉁 치려는 것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이론이나 교리를 알려주는 장이 아닙니다. 우리의 복을 비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감정을 토해 내는 카타르시스의 시간이 아닙니다.
기독교 예배는 인간 삶의 실존적 상황을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계속해서 가지고 나아오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실존 앞에 서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할 때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돌아볼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게 되고, 또한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 또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언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올려드리지 못하고, 여전히 거짓된 자신의 모습은 감추고 단순히 찬양하고, 나의 소원을 올려드리고, 좋은 말씀 경청하여 위로받고, 헌금하고 돌아가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시간 동안 헛물켜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그러기에 하나님은 16절에서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 회복이 이루어질 것인지 말씀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먼저 씻고 깨끗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악한 행실을 버리고 그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흠 없는 제물을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율법적 행실로서는 도저히 흠 없는 제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여 주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분의 의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산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외형적인 제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좀 교회를 위해 시간과 재능과 재정을 헌신했다고 나의 예배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케 한 뒤에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이 실천적으로 올려져야 합니다. 17절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나오는 의무사항입니다. 소외된 자들을 보살피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예배에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인 것입니다. 10절에서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셨고, 19절에서도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순종하여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경청했으면 즐겨 순종하여 그 말씀 안에 살아가야 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을 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행위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예배와 연결되어질 때 우리는 그 예배를 통해서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구별된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그 은혜가 삶 전체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만나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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