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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합니까? 마 22장 1-14절

by 최수근 2023. 10. 29.

2023년 10월 22일 주일예배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합니까? 마 22장 1-1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을 간혹 볼 때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음식을 만들고 나누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따뜻해지곤 합니다. “저게 사람 사는 모습이지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이 점점 삭막해지고 있습니다. 마을공동체도 점점 사라지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마도 이런 비인간화는 더욱 깊어지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7: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7: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우리에게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선포하고 있습니다.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우리가 세상에 나가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어주고 하는 공감이 넘칠 때 우리 세상은 따뜻해지지 않겠습니까?

이 일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구별 짓기와 개인주의, 이기주의입니다. 특히 구별 짓기는 자신의 특별한 양식으로 상대방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바로 그런 크리스텐뎀에 의해 성과 속으로 나뉘며 교회는 세상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모습을 상실해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우리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교만과 편견으로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기들만의 거룩함에 함몰되어 다가오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 왜곡됨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 팔레스타인에서도 엄청난 비극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오늘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들처럼 마음이 식어가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건 누구에게나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초대의 문이 열려 있지만 그 자리에 결코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도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건 초대에 대한 어떤 반응이었느냐에 따른 결과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바리새인들에게 세 번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이 말씀은 천국이 어떤 왕과 같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천국은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 잔치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고자 했습니다. 이 혼인 잔치에 초청한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초청했음에도 이들의 태도는 냉담했습니다.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임금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왕조에 대한 위험스러운 모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오기를 싫어한다는 종들의 말을 듣고 임금은 은혜롭게도 그들의 거절을 참았습니다. 이들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거절한 이들에게 임금은 다른 종들을 보내어 풍성하게 차린 잔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재차 오기를 청하였습니다.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렇지만 이들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왕의 초대를 거부하였습니다. 일상적인 일에 사로잡힌 사소한 변명을 들어서 말입니다.

22: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들은 임금이 베푸는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에 가지 못할 여러 이유가 있었던 거죠. 농사도 지어야 하고, 사업파트너도 만나야 하고, 이렇게 바쁜 이들은 각자 자기 일을 보러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도원의 소작농들처럼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이것은 왕에 대한 있을 수 없는 모독이며 반란이었습니다. 이런 악한 행동은 포도원의 비유에서 나온 소작농들에게서 볼 수 있었고, 그 주인이 소작농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임금도 살인한 자들에게 이제는 종이 아닌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진멸하였습니다.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왜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진 걸까요? 저들의 거절은 무엇을 의미하고 이들이 진멸하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걸까요?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는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결국 거역하고 만 겁니다. 이에 하나님은 새로운 선택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거절하고 종들을 죽인 자들을 처단한 후에 임금은 혼인 잔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청하도록 종들에게 이릅니다. 먼저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임금은 이야기합니다.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본래 왕의 초대가 주어졌던 사람들이 이제 자격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선민 이스라엘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 초대는 무효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무자격한 많은 사람에게로 그 초대가 확대되었습니다.

이에 종들이 길에 나가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초청받은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초청을 위해 그 어떤 자격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임금이 준비한 혼인 잔치에 올 수 있도록 초청하였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의한 선악 개념이 뚜렷했습니다. 자기들은 의롭고 세리와 창녀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들로 치부했습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 자리는 은혜로운 초대에 응한 그런 무자격자인 손님들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참여하기에는 한 가지의 조건은 꼭 필요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썰렁할 뻔했던 혼인 잔치에 사람들로 가득 차 분위기가 무르익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잔치 준비가 마치자 드디어 임금이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온 손님들을 보러 입장했습니다. 흥겨운 음악이 잔치 자리에 흐르고 사람들이 일어나 잔치에 초청해준 임금에게 예를 갖춥니다. 그런데 임금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금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던지는 질문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을 길에서 마구잡이로 초청하여 데리고 왔는데 예복을 입을 시간이 없었잖습니까? 그럼 다른 사람들은 초청받자마자 집에 가서 예복을 입고 왔다는 걸까요? 정황을 보면 모든 사람이 길에서 그냥 혼인 잔치 자리로 온 것 같은데 말입니다.

만나는 대로 누구든지 데려오라고 해놓고, 단지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임금이 노하여 이 사람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혼인 잔치가 틀어진 것을 모두 이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매우 불합리해 보일 뿐만 아니라 너무 나가는 듯한 모습입니다.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아니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입니까? 그냥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데 내던지라니요?

이 상황에 이르면 사람들은 그런 상상을 합니다. 아마도 이 사람이 혼인 잔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루한 옷을 입고 왔을 거라고. 그러니 왕의 잔치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기에 쫓겨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길을 가다가 황급히 끌려오다시피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예복 운운하는 것이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가리지 말고 데리고 오라더니 좋은 옷을 입은 사람과 나쁜 옷을 입은 사람을 가린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처사입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당시 고대의 관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 자료들에 따르면 그 당시 잔치에 필요한 예복은 잔치를 주최한 쪽에서 준비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리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왕이나 그런 예산을 쓸 수 있는 부자들이 그리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이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서도 사람들이 무작위로 길가에서 데려왔기에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잔치를 진행하기보다는 혼인 잔치를 빛내기 위해 임금이 손님이 입을 예복을 준비했을 것이고, 길거리에서 불리어 온 모든 사람이 그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으니 임금의 눈에 금방 보였던 것이죠. 그렇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임금이 하사한 예복 입기를 거절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임금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왕이 주는 예복을 입는 것은 왕의 권위를 받아들인다는 표시입니다. 그 점에서 조건 없이 잔치에 참여한 그들에게 단 하나의 조건은 왕이 주는 예복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을 입지 않았으니 왕의 권위와 호의를 거절한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이 사람은 왕의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요? 자기 옷 위에 왕의 예복 따위를 덧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남루한 옷이 아니라 매우 멋진 그 당시 명품 브랜드를 걸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 자신의 값비싼 옷을 가리는 왕의 예복을 입고 다른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잔치에 앉아 있는 상황을 결코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복을 거절하고 자신의 멋진 옷을 입고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을 과시하며 임금을 맞이했던 겁니다. 하지만 왕은 진노하였고 그런 그를 내쫓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과연 누가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잔치이지만 단 하나의 조건은 있었습니다. 그 잔치에 알맞은 예복을 입는다는 조건을 지켜야 했습니다. 사실 이 조건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새롭게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주는 옷을 입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그것을 거절하였던 것이죠.

예수님은 이 비유의 끝에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청함을 받은 모든 사람이 선택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국 잔치로 모든 사람을 초대하신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특권을 입은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거절하였고, 그 초대를 거절한 데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거부하든, 자기 일에 사로잡혀서 하든, 적극적으로 반항하든 부적절한 개인적 응답을 보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전 비유에서 예언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무자격한 자들에게로 향하시어 그의 나라를 축하하는 자들로 채우실 것입니다. 그 일에 단 하나는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그 예복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우리의 모든 허물은 그리스도가 덮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고 나아갈 때 우리는 담대하게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함께 그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이 기쁨을 누려야 하고 누린 기쁨을 나누며 세상 사람들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교적 교회공동체로서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기쁨을 가지고 아직도 복음 앞에 서지 못한 이들에게로 나갑시다. 그들이 변화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이것이 진정 부르심에 온전하게 응답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잔치, 기쁨이 넘치는 그 자리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벧후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벧후 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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