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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마 21장 12-19절

by 최수근 2023. 10. 20.

2023년 10월 1일 주일예배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마 21장 12-1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불신이 생기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유 중 하나는 진정성에 있습니다. 진정성은 진실된 마음을 다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 진정성은 일회성이 아닌 지속과 성실, 그로 인한 열매로 입증이 될 겁니다. 여기에서 어긋날 때 신뢰를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는 여전히 멀어 보였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는 예수님이 꿈꾸던 것과는 반대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자리로 끌고 가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은 본래의 목적대로 변함없이 가셨습니다. 주라 시인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여전히 진실된 마음을 다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무리의 모습은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갖게 될 수 있는 치명적인 오류에 빠져있는 상황입니다.

마태복음 211-11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에서도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과 죽음을 위한 입성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며 소리치는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겐 이스라엘의 왕으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입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 앞뒤에 서서 부르짖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지만 예수님은 무리의 환호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앞뒤에 서서 호산나외치며, 환호하는 무리 속에 합류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부화뇌동하는 행동은 아닌지, 그 길이 진정 제자로서 따르는 것인지 심각하게 진단해보아야 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길을 잘못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심지어 3년간 예수님을 수행한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밖에 모르면서, 혹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 뒤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사람들은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리의 바램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신의 목적대로 행동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성전이 인간의 무지와 탐욕으로 더럽혀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그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상업행위를 척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본래 성전용 제물과 물건들을 매매하는 장소는 감람산 위에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순례자들이 성전에 드리기 위해 비둘기와 다른 순결한 제물을 살 수 있는 네 군데 시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비호 아래 성전 안에 이방인의 뜰에서 새로운 시장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예배하러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객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습니다. 이권을 챙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곳에서 상인들은 순례객들이 성전세를 내기 위해 거룩한 돈을 환전할 때 많은 수수료를 챙겼고, 제물들을 시세보다 더 한 가격에 팔면서 폭리를 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그냥 둘러 엎어버리셨습니다. 이처럼 총체적으로 부정행위가 진행되고 있던 성전을 예수님은 깨끗하게 청소하여, 이곳을 통해 이권을 챙기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과의 마지막 충돌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돈 바꾸는 상을 뒤엎고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는 모습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격분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몰려들었습니다. 상인들을 다 쫓아내신 예수님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1:13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백성들의 영적인 영역을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특히나 상인들이 장사하던 곳은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인들이 들어와 기도하는 장소를 없애고 그곳을 자기들만의 장사 소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를 통해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광 돌리고 순종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자기들의 돈벌이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성전은 이미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그만 강도의 소굴로 전락 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유대교는 이런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형식만 장엄하고 그 안에 믿음이 없는 상태에 깊이 빠져버렸습니다. 철저하게 타락하여 하나님 없는 종교 행위만 자행되고 있었던 겁니다.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 <빈 십자가>가 이런 진정성 없는 종교인들의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에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외면하던 맹인과 저는 자들을 성전에서 치료해주셨습니다. 21: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자기 이권을 챙기는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에서 일어나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이 일을 통해 보여주신 거죠. 오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성전을 책임지는 지도자들에게 직격탄을 날리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계획을 세우면서 예수님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성전에서도 장사행위가 재개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들의 모습은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다음 날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저 멀리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셨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시장기가 느껴져서인지 혹여나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나무 밑으로 가셔서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하지만 잎사귀 외에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막 11:13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라고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데 열매를 찾은 예수님이 문제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면서 열이 좀 받치셨는지 저주까지 하셨습니다. 21:19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 하리라.” 때가 되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인정사정없이 저주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순간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왜 예수님께선 이렇게 상황에 맞지 않게 행동하셨을까요? 너무 배가 고파서 홧김에 저주하셨을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으신 걸까요?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앞에 성전 정화 사건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드러난 일화가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였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분위기를 말해줍니다. 이런 현상은 성전과 그 지도자들에 의해 더욱 구체화 됩니다. 그 각각은 번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느 것도 바람직한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던 첫날 성전을 둘러보시면서 그들 가운데 아무런 열매 없음을 확실하게 확인하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같은 경우 열매 맺는 과정을 보면 다른 나무와 달리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11월부터 3월까지 5개월의 우기 동안 앙상한 가지로 겨울을 보낸 무화과나무는 유월절이 다가오면서 조그만 잎사귀와 함께 첫 열매인 무화과를 맺고, 10월까지 이어지는 긴 여름 동안 무화과 열매를 다섯 차례 맺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어간에 열리는 첫 열매인 무화과와 이후에 열리는 무화과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가 전혀 다릅니다. 이때 맺히는 첫 열매를 파게라고 하고, 그 이후에 순차적으로 열리는 무화과를 테에나라고 합니다. 파게테에나를 모두 무화과라고 한 단어로 번역하면서 두 종류의 무화과가 구별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무화과나무에서 첫 열매인 파게를 찾은 예수님의 행동이 철에 맞지 않는 엉뚱한 행동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간에 잎사귀와 함께 맺어야 할 파게를 찾으신 것입니다. “테에나에 비해 당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충분히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파게는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일일이 따 줘야 합니다. 그래야 상품성 있는 테에나가 제대로 열립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 파게를 지나가는 행인이나 가난한 이웃의 소작농들이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먹을거리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열매요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첫 열매 파게가 없으니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긴 여름을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과 지도자들의 상태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수준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에 열매가 전혀 없음을 파악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마가복음에서는 좀 다르게 표현하셨습니다. 11:14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이처럼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열매 없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열매가 없다면 그것 또한 존재 의미를 상실했고, 결국은 죽은 신앙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몰아내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연결함으로써 열매 없는 성전과 종교 지도자들을 심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서로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들어가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고 유월절 어간에 열려야 할 파게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당시에 타락한 유대교가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즉 형식만 있고 열매가 없는, 내용이 없는 유대교라면, 동시에 심하게 부패한 성전의 제의와 종교라면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없다고 여기셨고, 더 이상 사람들이 열매를 따 먹지 못하도록 폐기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 말씀은 오늘 잎사귀만 무성하고, 입술로만 요란한 교회들을 향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겉으로는 뭔가 화려한 것처럼 보이지만, 말은 무성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열매 맺지 못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열매 맺지 못하는 수많은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은 분명히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열매 없음을 들추어내시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되고 말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무화과나무처럼 무엇인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 열매로 인해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어야 할 영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존재 의미를 상실함으로써 똑같이 심판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적대자는 반드시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득권의 뿌리를 내리고 개인의 욕심을 채우고자 했던 대제사장처럼 오히려 교회 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자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세력들이 교회 안에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타락한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런 자들을 향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경고하실 것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현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나의 신앙이 잎사귀만 무성한 형식적인 신앙이 아닌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겉으론 뭔가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 같지만, 뭔가 말로선 풍성한 것 같은 데 결실이 없는 믿음의 진정성이 상실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까? 우리는 율법적인 신앙, 형식적인 신앙을 탈피해야 합니다. 형식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내용이 채워져야 합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신앙이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타락한 신앙이 아닌가를 보아야 합니다. 세속주의와 배금주의에 빠진 그래서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신앙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세속화된 신앙은 이미 죽은 신앙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겁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이야기와 연관시킴으로써 열매 없는 신앙, 형식적인 종교 제의를 고발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와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이런 세속화된 신앙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설령 있어도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잃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곧 말라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성전 또한 주후 70년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 서기관들이 수없이 로마 군대의 칼에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잎사귀만 무성함으로 무책임한 교회가 아니라, 열매 있는 교회가 되고, 열매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서 완전한 성령의 열매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비록 투박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파게와 같은 그래서 그 파게때문에 다음 열매인 테에나를 기대할 수 있는 첫 열매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는 하나님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첫 열매를 맺어 올려드리고,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누는 성숙한 열매를 맺어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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