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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까? 마 21장 33-46절

by 최수근 2023. 10. 26.

2023년 10월 15일 주일예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까? 마 21장 33-46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브루투스를 향해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치는 짧은 말에서 배신당하는 이의 마음이 어떤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가 내뱉은 말은 아니라고 해요.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던 그 순간 아마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예부터 배신은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습니다. 가족, 친구, 공동체 등과 같은 두터운 인간관계를 훼손하는 범죄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보면 최악의 제9배신 지옥이 죄목에 따라 4구역으로 나누어집니다. 가족과 친척을 배신, 조국과 동료들을 배신, 친구를 배신, 은혜를 배신한 순서로 내려갑니다. 은혜를 배신한 일이 가장 큰 죄목인 거예요. 지옥 맨 아래층에서 은혜를 배신한 세 명이 얼음에 처 받힌 채 지옥의 지배자 루시퍼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들어와 극단적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배신, 배반에 대한 감정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선 쉽게 돌아서 버리기 때문이겠지요. 은혜를 그렇게 입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이익에 반한다면 서슴없이 돌아서 버립니다. 믿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은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 받은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고 신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인가요? “당신은 누군가에게 믿을 만한 사람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은 이 대답에 자신 있습니까?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입니까? 나를 사랑하고 기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신실하게 나아가는 일이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입니까? 만일 이것이 어렵고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이라면 우리를 택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 또한 어렵고 부담스럽게 여겨지지 않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1~7절에 포도원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건 기대가 심각하게 무너지는 배신의 상황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조성하고 거기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좋은 포도를 맺지 못하고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해 살지 못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상징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기대를 하셨는지를 말합니다.

5:7 “무릇 만국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정의와 공의의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반대의 열매를 맺고 말았습니다. 그 정의와 공의는 이웃을 향한 덕목입니다. 이것이 실패했는데 하나님 앞에 어떻게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기대가 무너진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5: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5: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초점이 이스라엘 전체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물론 맥락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오직 자기들의 욕심으로 인해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에 이른 자들에게 날리는 심판의 경고입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두 아들 비유의 요지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동에 실패한 것이었다면 여기에서의 문제는 그들에게 특권을 누리는 지위를 맡기신 하나님께 대한 또 다른 결여의 모습, 충성의 결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지적하신 저들의 결여로 인해 점점 더 적대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것 자체가 농부들의 행동과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아들 비유에 이어 한 비유를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소작농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어 운영할 계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포도원을 만든 뒤에 주인은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잘될 거라고 기대하고 소작농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나 포도원에 열매를 거둘 때가 다가오자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소출을 결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외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로마인이 팔레스타인의 경작지에 투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지역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경작지를 소작농에게 임대한 부재지주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소작농들과 계약을 한 경우 주인과 소작농이 나누는 비율은 반반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주가 멀리 있다 보니 계약처럼 진행되지 못하고 분쟁이 발생했던 경우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을 지금 이야기한 겁니다.

오늘 비유에서도 다른 부재지주들 경우처럼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도원의 소작농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도원 임대에 대한 지급을 거부해버린 것입니다. 그들을 신뢰했던 주인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겁니다. 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이들은 그에 따른 후환을 없애려고 주인이 소출의 결산을 위해 보냈던 종들을 잡아 살해하고 폭행했습니다. 한참 뒤 불행한 소식을 접한 주인이 악한 농부들을 처단하기 위해 더 많은 종을 보냈습니다. 21: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하지만 역시 이들도 똑같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우발적 사건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상당히 준비를 한 경우처럼 보입니다.

주인은 이와 같은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아마도 자신을 대신해서 협상을 시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주인은 아무리 저들이 지금까지 보낸 종들을 죽이고 폭행을 가했지만 자기 아들에 대해서는 존대할 것이라 예상했던 겁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21: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들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까지 모의를 하였습니다. 지금 아들이 왔는데, 저가 상속자이니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자고 했던 겁니다. 어찌 아들을 죽인다고 그 유산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주인이 살아있는데 말입니다.

사람이 눈에 무언가 쓰이면 이렇게 자기 좁은 생각에 갇혀 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여기까지 비유를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21: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맞습니다. 저들의 대답처럼 주인이 아들까지 죽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다른 성실한 농부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결코 포도원은 주인을 배신한 농부들 차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어리석은 일을 범하고 만 걸까요?

예수님은 다시금 저들에게 성경 구절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21: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이건 시편 11822~23절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인데, 건축 현장에서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모퉁잇돌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악한 소작농들과 이 이야기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길래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언약을 세우고자 하실 때 이들은 자기들 권력의 기득권을 위해 예수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렇게 저들이 비록 예수를 버리고 포도원의 소작농들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새 언약 공동체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하셨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신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대적한 저들의 최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대답도 듣지 않으시고 저들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길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로 부름을 받고 몸소 예수와의 관계를 경험하는 특권을 가졌지만 그들의 계획과 굳은 마음이 끝내 예수와 그의 메시지를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의 특권과 책임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 특권과 책임은 이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응답하는 사람들,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에게로 넘겨졌습니다. 새 언약 백성의 특징은 민족성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들이 열매 맺는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 나뭇가지에서 열매를 찾으시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열매가 없기에 저주받고 나무는 말라버렸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고, 열매 맺지 못함에 그들은 그들의 역할이 다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파국에 이르게 될 것임을 예수님은 덧붙이셨습니다.

그제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알았습니다. 그 경고가 자기들을 향하고 있음을 말입니다. 21: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그렇다면 그들은 회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회개하라고 외치던 세례 요한 앞에서도 회개하지 않았던 저들은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무리가 무서워 저들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있는 무리가 무서었기 때문입니다.

21: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저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을 무서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은밀하게 하나님의 역사에 반하는 일들을 진행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주인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비유의 말씀을 실제화시키는 일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에 반하여 오직 자기의 것을 위해 마음을 굳게 하는 자신의 일정을 고집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건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산다고 떠들면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비유를 통해 그런 우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내하시지만, 우리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의 소명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기대가 무너지고 대적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면 신뢰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과 특권을 넘길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삶을 살고 행하도록 위탁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할 영역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에 따른 결산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것만을 위해 종교 지도자들이 보였던 그 모습으로 나아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다면 우리는 결국은 열매 맺지 못하는 자로서 그 은혜의 자리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누릴 수 있는 자는 열매 맺는 자이어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충성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결산의 때에 우리 주님께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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