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3일 주일설교동영상
[헌신과 가치: 요 12장 1-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이야기는 요한복음 12장과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에서 나옵니다. 서술에서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이야기라고 봅니다. 누가복음 7장의 여인 이야기는 예수님 초기 사역의 일로 다른 사건으로 봅니다. 이야기의 장소는 베다니라는 곳이었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입니다. 여기에서 유월절 엿새 전, 예수님이 잡히시기 바로 한 주 전에 예수님을 위해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잔치 음식을 위해 마르다는 일을 하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여러 사람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흥겹게 먹고 마시고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북인도에서 수입된 매우 희귀하고 값비싼 향유인 나드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녀가 옥합을 열어 나드 한 근을 예수님께 붓는 순간 온 집에 순전한 나드 향기로 가득 찼습니다.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 본문을 대할 때 사람들은 대개 아름다운 헌신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회상황에서 보면 마리아의 행동은 상당히 도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남편이 아닌 남자의 발을 씻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제자 중 예수를 팔 가룟 유다가 이 행동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을 잘 들여다보면 가룟 유다가 마리아를 야단치지만 도덕적 비난이 아닌 나드향을 사용한 목적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5절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언뜻 보기에는 유다의 말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이 선물 자체는 너무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 중에서도 유사한 생각을 한 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제자들’ 은 마리아의 행동이 쓸모없는 엄청난 낭비라고 하면서 분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삼백 데나리온의 가격은 일용직 노동자의 일 년 치 급료였습니다. 그러니 평범한 유대 가정에서는 이런 일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요한은 가룟 유다의 의도가 돈을 착복하려고 하는 나쁜 곳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지만 실은 그곳에 있던 대다수 사람이 쏟아진 향유를 아까워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돌출 행동이 오직 예수님 한 분에게만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치에 대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마리아는 옥합에 든 향유,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최저시급 8350원에 하루 9시간 주5일 근무를 했을 때 19,539,000원어치의 향유를 단지 예수님을 소중히 하고 그를 높이기 위해 불과 몇 분 만에 쏟아부었습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이 일이 정말 해야만 할 가치가 있었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행동이라고 두둔을 하셨지만, 마리아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장례를 위한 준비를 예측하고 한 완전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믿고 준비했던 이는 없었습니다.
단지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그와 같은 섬김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실은 돈의 문제로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8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값비싼 향유이지만 지금 쓰여야 할 순간에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지나면 억만금의 나드향이 있어도 예수님을 위해 부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그 행동의 가치와 그 가치가 실행되어야 할 적절한 때가 아닌 단지 환산할 수 있는 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마리아가 매우 저렴한 향유로 이런 일을 했다면 이렇게 비난을 받았을까요?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마음을 알기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지언정 돈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 사역 혹은 개인 신앙의 우선권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은 이런 핑계를 많이 댑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가치들보다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에 재정이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유다의 음성과도 같습니다. 5절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 일에 가치가 있어도 그냥 쏟아 부어지는 것보다 드러날 수 있는 실체가 있는 결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가치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면 거기로부터 얻는 것이 가치가 더 크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사님들이 선교현지에서 부닥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10년 동안 수많은 선교비가 들어갑니다. 하지만 고작 몇 명밖에 믿음의 결실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파송한 교회의 선교국은 몇 명의 영혼이 구원받았음에 기뻐하기보다는 결실 없는 것을 불편 해 합니다. 현지에 교회가 세워지지 못한 것을 질책합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가치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것은 낭비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사용되어야 할 돈을 사치스러운 것을 사거나 행동에 쓴다면 그것은 문제일 것입니다.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눈에 용납하지 못할 낭비로 비쳐질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행동과 같은 ‘영광스러운 낭비, 거룩한 낭비’가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가치로서 헤아릴 수 없는 가치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충분히 모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마리아의 헌신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반드시 그녀가 드렸던 나드 향과 같은 고과의 선물이어야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에게는 돈이 아닌 우리 행동의 가치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물 한동이 밖에 없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주님의 발을 씻겨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우리의 헌신의 마음과 그것이 어떤 목적이냐가 그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중심과 가치를 보시는 것입니다. 위선자의 값비싼 위선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기뻐하셨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생각할 것은 향유 나드가 단지 개인적인 경건과 헌신의 은유일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 공동체의 헌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영적 우선순위의 것들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이 땅을 섬기기 위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 땅을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공동체라면, 그렇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의 섬기는 일에 쓰여진 삼백 데라리온의 가치를 우리는 다른 것에 비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 역으로 주님만을 위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이 땅을 향한 우리의 사명을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나 거반 죽어가던 사람의 옆을 그냥 지나쳐 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이 어쩌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른 일을 하려고 애쓴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와 함께 중요한 한 축인 이 땅에서의 이웃사랑의 섬김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우리가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헌신과 삼백 데나리온으로 가난한 자들을 섬길 수 있는 헌신 사이에서 올바른 방향을 지어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나누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언으로서 너무나 신중하고 권형 잡힌 나머지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풍성함을 앓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서는 실로 ‘지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사랑과 헌신을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 ‘버릴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은 아무리 시시하더라도 파괴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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