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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가라지를 뽑아버릴 수 없을까요? 마 13장 24-30, 36-43절

by 최수근 2023. 5. 8.

2023년 4월 30일 주일예배

[가라지를 뽑아버릴 수 없을까요? 1324-30, 36-4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일 년이 넘도록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는 만큼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수단에서 내전이 일어나 군부의 권력 싸움으로 인해 많은 수단의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화되고 평화를 회복하기를 원하지만, 악인들의 반복되는 득세는 지구촌이 몸살을 앓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땅의 악은 언제나 종식될 수 있을까요?

1, 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수천만 명의 생명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비극을 겪으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곳곳에서 학살을 일삼는 전쟁이 그치지 않고, 악으로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세상에는 제도적 악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세 사기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피해를 봤고, 여러 명이 이를 비관해 목숨을 끊는 일이 생겼습니다. 투기꾼들에게 갭투자가 당연시되고, 그에 따른 정부의 규제도 없는 상황에서 서민들만 사지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남들이 피해를 보든 상관없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그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무지의 상태에서 특정한 가치에 동화될 위험성을 늘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큰 집을 선호하듯 큰 교회를 선호합니다. 명품 차를 부러워하듯 멋지고 훌륭한 믿음의 결실을 부러워합니다. 결국 화려하고 멋지고 큰 것들은 하나님의 복과 은혜라는 명분을 얻으며 어느새 악순환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듯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발생하는 익숙함 속에서 믿음은 아무런 방어막도 쳐주지 않습니다. 만일 믿음이 세상의 상징적 폭력과 같은 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도리어 믿음은 새로움이 아니라 구태를 공고히 하는 기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지금 소위 어글리 크리스챤들과 목사들이 저지르고 있는 이 땅의 상황에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신데 왜 이런 악과 무지함을 그냥 두고 계시는 걸까요? 입을 함무로 놀리고 잘못된 자리임에도 거룩한 척하는 이들과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악과 삶의 모든 부조리를 바로바로 잡아주시고 처단해주시면 이 세상은 그래도 좀 나은 세상이 될텐 데 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는 결코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현실적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 걸까요? 이 고민 가운데 오늘 두 번째 비유, 가라지 비유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의 가라지 비유는, 하나님 나라일 것으로 기대되는 세계에 왜 그토록 끊임없이 악이 존속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복음의 씨를 심는 일을 통해서 이 세상에 시작되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악한 자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거나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의 생존을 막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불편한 동행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할까요?

예수께서 무리에게 두 번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고 하시면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좋은 씨를 자신의 밭에 뿌린 사람에 비유하신 겁니다.

한 사람이 좋은 씨앗을 자기 밭에 뿌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이 되어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원수가 그 밭으로 몰래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좋은 씨앗의 싹이 나고 결실할 때 가라지도 같이 자라 무성해 버렸습니다.

분명 좋은 씨를 뿌렸으니 그 밭에서 좋은 곡식이 자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처음에 알지 못했던 문제가 열매를 맺을 즈음에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가라지가 밭에 무성한 것을 발견하고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묻습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이에 주인이 말하였습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주인이 뿌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종들이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다 뽑아버릴까요?”

이에 주인이 대답하였습니다.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아마도 이와 같은 비유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 건지, 사람들은 궁금했을 겁니다. 그런데 누구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바로 예수님께 이 비유를 설명해주실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이것이 진정한 제자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모르면서도 아는 척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겠어요. 이 시대에도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신앙적인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길을 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신앙을 세워갈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께서 비유를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13: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인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메시아의 호칭이 바로 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상에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좋은 씨는 바로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13:38a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그런데 그 밭에는 좋은 씨만 뿌려진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몰래 가라지도 뿌렸습니다. 가라지의 정체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13:38b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좋은 씨인 천국의 아들들이 있지만 그 밭에는 가라지, 악한 자의 아들들도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그러나 가라지는 바로 처리 되지 않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힐 수 있어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둘 것입니다. 하지만 가라지의 끝은 정해져 있습니다.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가라지의 끝은 분명합니다. 바로 불사름입니다. 끝까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 끝 추수의 때에 하나님은 그 가라지를 분명하게 처리하실 것입니다.

13: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세상 끝 최후의 심판에서 이루어질 일 가운데 하나는 가라지를 처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상에서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도록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그래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세력들, 불법을 자행하는 모든 자들을 거두어 내실 것이고, 전부 풀무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자리에서 그들은 처절하게 절규할 것입니다.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반면에 의인들은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태복음 1347-50절의 그물 비유도 가라지 비유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그 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말씀합니다. 좋은 씨를 뿌린 밭에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는 것처럼 그물에도 좋은 물고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나누는 일은 그물을 해변으로 끌어올린 후에야 가능합니다. 그때는 바로 세상의 마지막입니다.

이 두 번째 비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심판 때까지 공존하는 교회에 적용되는 이야기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잘 살펴보면 교회에 적용하는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명백히 밭은 세상(38)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밭과 교회를 동일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비유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활동을 묘사합니다. 천국이 이 시대에 악한 자의 아들들과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 점에서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신자와 거짓 신자의 공존으로서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많은 오해와 잘못된 적용을 낳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실로 이 세상에 임하였지만, 그것으로 인해 악을 이 세대에서 완전하게 근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악한 자의 아들들은 머지않아 뽑혀 제거될 것입니다(41). 세상은 왕이신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예수님이 주도하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하는 날은 세상 끝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악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만 선포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 나라를 현재 우리의 역사 안으로 앞당겨 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왕들이 통치하는 이 땅에서 세상의 통치와 대립한 채 존재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악과 함께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그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이 일을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미래의 삶도 믿지 않고, 엄청난 분리의 최종 형태인 천국과 지옥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고대하면서, 그것을 기다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고 더욱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이 땅에 조용한 혁명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최후 순간에 입증될 입니다. 세상이 끝나기 전에 악한 것들의 완전한 멸망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이 딜레마를 견디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감추어지고 눈에 띄지 않는 부조화의 모습은 많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간과하고 거부하게 만들지만, 지금 이곳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발견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이 시대의 계시입니다.

이것을 보는 이들만이 지금은 거의 구분되지 않지만, 최후 심판 때에는 천국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누가 천국에 속하고 누가 천국에 속하지 않은지를 온전하게 알게 하는 마지막 분리는 이 시대의 끝에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깨어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악에 오염되어 있는 환경에서 살 때, 이 시대에서 영적인 전투를 예상해야 합니다. 물론 이 비유가 이 세상에서 악한 자의 아들들과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 간의 공존을 언급하고 있을지라도 교회에 대한 부차적인 적용이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는 우리가 대적자의 계획을 알게 만듭니다. 사탄이 교회에도 침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즉 사탄의 계획에 맞서 기도할 것을 격려받습니다. 사탄이 이 세상에서 심판 날까지 활동할지라도, 우리의 공동체에서 기반을 다지지 못하도록 죄 된 활동을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와 함께 교회 공동체에 있는 죄를 효과적으로 재빨리 다룸으로써 사탄의 영향을 축소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우리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 일은 성령 안에서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일로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생각하지 않고 도덕적 질문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을 때, 악은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됩니다. 평범한 그 누구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지 않는다면 묵묵하고 성실한 삶도 의도치 않게 언제든지 일상적 악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게 악의 일상성이고 평범성입니다.

좋은 씨가 뿌려진 밭에 어느새 나타난 가라지가 만일 나라면 이처럼 끔찍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누구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 심판 앞에서 나는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그러나 세상은 너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마! 너는 그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은근히 압박하여 다가옵니다. 그런 것들이 어느새 유행되고 가치가 된 그것들을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열심으로 답습하는 것이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의 가치는 어느 순간 당연하게 되어 우리의 삶을 통제합니다. 이 가치가 악인지 선인지 구분할 틈도 없습니다. 악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당연히 여기는 가치를 거스르는 행위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세상은 지긋지긋하게 변화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땅을 회복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언제나 믿음의 바른길에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스스로를 보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늘 깨어있어 겸비하여 성령의 조명 가운데 날마다 걸어가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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