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일 주일예배
[예수님 앞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 마 21장 1-11절]
오늘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장면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그려가고 있는 이 장면을 보면 그 당시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저마다 약간의 다른 각도에서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대하는 다양한 부류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폭적으로 예수님을 지지하는 자들, 반대하는 자들, 죽이려고 하는 자들, 방관하는 자들, 작은 섬김이 있는 자들, 아주 다양합니다.
물론 어떤 일이든지 모든 사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변화의 거센 바람이 불 때 지금 자기 일에 파묻혀, 혹은 자기의 작은 유익에 심취되어 있다면 변화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구축되었을 때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이들을 보면서 나는 어느 부류인지를 살펴봅시다.
제자들에게 말씀해 오셨던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예언서 스가랴 9장 9절의 성취로서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아닌 평화의 왕으로 자신을 내어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때 제자들에게는 소유한 나귀가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마 21:2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제자 둘이 그곳으로 가서 나귀를 데려가려 하자 나귀 주인이 “당신들 뭐냐고” 당연히 말했겠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해주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라는 말에 주인은 나귀 새끼를 그냥 내어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엉겁결에 주의 오심을 예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치 강탈 수준처럼 보여 자원한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자기의 나귀 새끼를 드림으로써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는 주님의 길을 위해 섬겼습니다. 물론 공권력을 동원해 차출하는 것이 아니기에 끝까지 거부했으면 제자들이 그 나귀를 어떻게 끌고 왔겠습니까? 그 주인의 마음에 감동이 있으니까 자기 재산인 나귀 새끼를 내어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불시에 요구되는 부르심에 무명의 이 사람처럼 여러분은 섬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기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겠습니까? 주께서 쓰시겠다는 요청 앞에서 주님을 위해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고, 내어드리기를 거부하고 움켜쥐고 있다면 우리는 끝내 주님과 무관한 자가 되고 말 겁니다.
두 번째 부류는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던 제자들과 무리들입니다.
제자들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종려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깔면서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일에 열광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이 뒤를 따르면서 무리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마 21:9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외쳤습니다. 눅 19:38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을 환영했을까요? 예수님이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온몸으로 막아섰습니다. 그걸 보면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했을 겁니다.
결국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이들은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무리 또한 군중심리에 맥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자들도 있지 않았을까요?
세 번째 부류는 예수님을 연호하며 소리치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께 이들을 책망하라고 말했던 바리새인들입니다. 눅 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그들은 예수님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을 깨뜨리고 들어와 신랄하게 그들을 비판하는 예수님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칭하는 것이 거북살스러웠을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눅 19:40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나는 예수님 앞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자로 전락 되어 있지 않은지요? 그런 상태에선 사람들이 하는 일이 늘 못마땅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을 정죄하곤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부류는 주님이 오시든 말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성전에서 장사하고 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루살렘 성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주님은 분노하여 외치셨습니다. 눅 19:46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결탁하여 백성들에게 제물을 비싸게 팔기도 하고, 성전세를 내기 위해 환전할 때 높은 수수료를 받았기에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오심 앞에 여전히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놓지 못해 여전히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을 내려놓고 주를 쫓으라고 하셨는데,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부류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하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자들입니다. 아직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에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지지하는 이들도 있지만,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많은 이들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 흘리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눅 19:42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그들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처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처럼 우리의 눈을 가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나귀 새끼를 드린 주인처럼, 잠깐 배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그분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는 제자들처럼 예수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자신의 결정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왕으로 우리에게 오심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우리 자신의 것들을 내어드리고, 그분을 높여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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