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7일 주일예배
[겨자씨와 누룩 비유: 마 13장 31-3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이 어떤 일을 접하게 될 때 ‘성장’을 기대하곤 합니다. 누가 본전 생각하고 사업에 뛰어들겠습니까? 요즘 유명 가수가 연루된 주가 조작 사건으로 많게는 1조 원 정도를 사람들이 손해를 보았다고 해요. 왜 사람들이 몰려들었을까요? 대박에 대한 기대에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대박보다는 쪽박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신앙에 대한 접근도 이런 심리가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에도 성장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사 60: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우리는 다양한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참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단지 축복이나 성장, 발전과 풍성함으로만 정의할 수 없어서입니다. 그것을 어찌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익숙한 자본주의 사고는 하나님 나라를 성장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은 성장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성장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전환하지 못하면 우리는 끝내 왜곡된 신앙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본질과는 점점 멀어지고 말겠지요.
그와 같은 점에서 예수님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사람들이 열망하는 성장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참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가치가 무엇인지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어떤 특별한 영역과 제한된 사람이 아닌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 나라의 충만함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마 13:31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씨는 당시에 팔레스타인에서 잘 알려진 아주 작은 씨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은 씨를 하나님 나라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씨가 자라 나무가 된다고 하셨지만, 실은 나무라기보다는 일 년생짜리 야생풀입니다. 풀과 나무는 엄연히 다릅니다. 겨자풀이 아닌 겨자 나무라는 표현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과장이었습니다. 완전히 자란 겨자씨가 생각처럼 크고 훌륭한 나무의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사람들의 상식을 뒤엎었습니다. 그냥 겨자풀이라고 부르면 족할 것을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에 빗대어 말하고 있어서입니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는 은유로써 겨자씨의 잘 알려진 미미함이라는 표현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그것이 엄청날 것이라고 늘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공중의 새가 깃들일 수 있는 크고 멋진 나무에 대한 상징은 낯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그런 모습이 그려집니다.
겔 17:2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겔 17: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이것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 심는 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풀씨를 뿌림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대적자들과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매우 우습게 여기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생각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무슨 의도로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이와 같은 과장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은 어떤 사람에 의해서 이제껏 정당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뒤엎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익숙한 질서, 관습, 편안한 삶을 흔드셨습니다. 물론 겨자씨 비유를 보면서도 사람들은 단순히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내려고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성장에 대한 희망이 진정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자세히 보면 하나님 나라는 많은 사람이 고대하는 레바논 백향목과 같지 않습니다. 그런 잘못된 기대를 깨뜨리고 다른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지금 인간적인 기대로서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는 한 결국 실망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장을 부추기는 수단으로써 겨자씨 비유를 보는 한, 우리 내면에선 그렇게 큰 나무가 되지 못한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끊임없이 정죄하고 속삭일 것입니다. 그러니 큰 나무가 되지 못한 현실 위에 좌절은 더해지고, 하나님 나라의 길은 눈에 잘 띄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를 바로 보려고 하면 새로운 눈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가치로 하나님 나라를 본다면 언제나 왜곡된 결과를 얻게 되는 거죠. 그런 그들에게 겨자풀은 여전히 겨자풀인 겁니다. 그러니 레바논의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사람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위대한 나무만을 찾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나라와 함께 임하셨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바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겨자풀과 같은 일상, 그래서 다른 이들이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어쩌면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 고통스럽고 갑갑하고 언제든지 떠나 버리고 싶은 허다한 시간들 속에서도 귀한 생명을 경험하고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겨자씨처럼 뿌려졌고, 당장은 비록 미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위대함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겨자씨 비유에 이어 네 번째 누룩 비유에서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의 사상을 계속 잇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놀라운 방식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마 13:33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빵을 만들기 위해 누룩을 넣고 밀가루를 반죽하는 평범한 일상 속 여인의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의 일상과 다를 것이라는 상상이 무너지는 비유입니다. 누룩도 그렇고 여인의 이미지도 그렇습니다. 이처럼 여인, 누룩 등의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이 상황도 겨자씨 비유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약성경은 누룩을 거의 예외 없이 부정적인 은유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 지낼 때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으로 제사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무교절에는 누룩의 소유 여부에 따라 사람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끊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출 12:15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예수님도 누룩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면서 그 부정한 누룩을 상징으로 가지고 온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설명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는 부정하다고 말하는 일종의 도발과도 같은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대상에 하나님 나라를 빗댐으로써 그들의 편견과 선입견을 깨뜨려버리셨습니다. 그러면서 부정적 이미지인 누룩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데 사용하셨던 겁니다. 저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굉장한 뭔가를 기대하는 특별함이었는데, 예수님은 누룩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특별함이 아닌 일상의 모습에서 누려야 할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여인은 가루 서 말에 해당하는 반죽을 하고 있습니다. 대략 백 명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이렇게 많은 양의 가루에 누룩을 넣었습니다. 그러면 이 반죽은 엄청나게 부풀어 오를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지금 여인은 많은 사람을 초대할 잔치를 준비하는 겁니다.
이렇게 여자가 넣은 누룩은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생명의 잔치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재료였습니다. 누룩 덕분에 밀가루 반죽이 발효되어 풍성히 부풀어 오르기 때문입니다. 이젠 모자람 없이 잔치를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넉넉한 잔치의 이미지를 갖습니다. 많은 사람이 와서 충분히 생명의 떡을 나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편견을 깨면서 누구든지 와서 먹으라고 초청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깃들어 안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게 될 위대함과 영광이 어느 특정한 부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매우 평범하고 특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편견을 깨면서 누구든지 와서 먹으라고 초청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 나라는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넉넉한 빵이 있습니다. 누룩으로 부풀려져 많은 사람이 나누기에 충분한 빵으로 그들은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이런 일상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돌아보게 하고 그 나라를 새롭게 상상하도록 하셨습니다. 만일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의 안목을 끝내 거부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눈에 띄지 않고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비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상상하던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가 동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가장 부정한 누룩에 빗댄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고 그들은 판단했던 겁니다. 그러니 빵에 넣은 누룩과 같은 하나님 나라가 어처구니없어 보였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초청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결코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의 기쁨이 회복되려고 하면 눈을 가리고 있던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도 그렇고 하나님 나라 비유에서도 그렇듯 그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장착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존재는 두드러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의 실존은 이 세상에 침투하여 하나님 아들딸들의 마음에 감추어진 변화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누룩처럼 엄청난 영역에서의 헌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세워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로 인해 이 땅을 새롭게 뒤덮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광휘로 말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지금도 이루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의 통치 앞에 섭시다. 잘못된 편견과 맹신에서 야기된 모든 우상을 버리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입시다. 그럴 때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과 하나님 나라 잔치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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