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3일 주일예배
[말씀에 반응하는 그리스도인: 마 13장 10-17, 34-35절]
우리가 살아가면서 처음 접하거나 배우게 되는 것들의 초보 단계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그 과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하면 포기하는 이들이 생기게 되고 마지막 단계까지 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을까요? 이것은 일상적인 삶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의 영역에서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기적을 행하시고, 각종 율법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해석하여 말씀하여 주실 때까지만 해도 말씀에 권세가 있다고 하면서 많은 이들이 따라붙었습니다. 이건 오늘 우리 기독교 안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일들입니다. 눈에 보이거나 자기 귀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거나 눈길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감정적이고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에서 그들이 신앙하고 있어서입니다. 이럴 때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단세포적인 신앙에 도전이 가해질 때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사역 어느 시점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실 때 비유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직설적인 말씀이 아닌 수수께끼와 같은 이야기들을 해 가실 때 사람들의 반응은 그 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호함으로 인해 일단 뭐가 뭔지 잘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더 깊이 파고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잊어버리고 넘겨버리시겠어요?
예수님은 왜 비유로 가르치셨을까요? 제자들이 볼 때도 무리들이 비유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고, 실은 자기들도 어려웠기에 그렇게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궁금해서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마 13: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처음부터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는 항상 투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임했지만 완전하게 드러난 능력으로 임하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질서를 전복시키지 않는 비밀이거나 감추어진 형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이곳에 임하였기에 실제로 그것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중간 시대인 현재를 알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믿음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오직 믿음과 헌신의 사람들만 이 현재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들을 아는 것을 허락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 중 많은 이들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힘이 있는 명백한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시면서 의도하신 것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들이 기대한 것 즉 메시아 시대의 축복에 기초하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복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물론 복을 소망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기복신앙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메시지를 간과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복에 대한 소망이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드러내신 진리가 무리에게는 감추어졌습니다. 그들의 왜곡된 시선과 영적인 무반응 때문입니다. 단지 감추어져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이들의 영적 무반응과 무지로 인해서 가진 것조차 전부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불공평하게 보이지만 이것이 삶입니다. 만약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근육을 사용하는 능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근육을 사용할수록 근육의 크기와 힘은 증가할 것입니다. 영적 차원에서도 같습니다. 비유의 말씀은 그것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빛을 가져다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어두움을 더할 뿐입니다.
비유들은 이중 방식으로 기능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전도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에게 비유들은 더 많은 통찰력과 지식을 전달하는 반면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비유들은 주제를 더 어둡게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믿음과 헌신은 더 많은 지식으로 인도하고, 불신은 더 큰 무지로 인도하게 됩니다. 무리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여기에서 비유로 말씀하는 예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무리가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계심을 암시합니다. 그와 함께 이들의 영적인 굳은 마음이 비유를 보지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무리들은 여기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적 성향을 아시므로 궁극적으로 응답할 수 없는 지점으로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데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또한 복음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아시므로, 예수님에게 와서 제자가 되고 설명을 구하는 적극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의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 앞에 개인적인 인간의 책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지의 늪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거죠.
이와 같은 상황은 예수님 당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8세기 전 선지자 이사야도 무지한 군중을 향해 같은 말로 외쳤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오늘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메시지를 거부했습니다.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무지와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들은 더는 변화되기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변화를 꿈꾸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도전에 각종 자기만의 논리를 펴면서 저항하곤 합니다.
톨스토이의 “있는 자들의 한가로운 대화”라는 단편에서도 보면 변화에 대한 도전에 귀를 닫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뭔가 새로운 도전을 이야기해보지만, 옆에 사람들에 의해 다 차단될 뿐이었습니다. 말은 무성했는데 거기에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건 복음 앞에 선 인간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신 것처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인정하도록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비유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이 그들의 마음의 본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무리 중에 사람들이 영적인 귀가 없다면 그들의 마음은 점차적으로 더 굳어지고 예수님과 천국, 그와 함께 오는 치유를 차버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를 들을 수 있는 이들은 복된 것입니다.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가리워졌던 하나님 나라의 계시가 이들에게 선포되었고, 그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간에 많은 경건한 이들이 볼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던 것들을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고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처럼 비유는 듣는 자들의 마음을 검증합니다. 비유는 영적인 심사로서 작용하고 그 사람의 마음이 예수님의 메시지에 열려 있는지 닫혀 있는지를 나타내는 청자들로부터의 반응을 촉진 시킵니다. 후자의 경우에 비유는 혼란이나 노골적인 반대를 자극할 것이고, 예수님과 진리로부터 멀어지도록 청자들을 촉발시킬 것입니다. 그 점에서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계시와 제자들의 순종적인 수용성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와 불이해를 가르는 구분선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비유는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예수님의 메시지에 열려 있다면, 그는 제자들처럼 그 비유의 의미에 대해서 더 분명한 해석을 얻고자 예수님에게 나아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종교 지도자들과 무리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천국이 작용하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적극적인 반응은 자세한 해석을 구하도록 촉발시킵니다. 마 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그런 그들의 요청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대한 부가적인 진리로 보상받습니다. 제자들이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않을지라도 온전하게 발전할 수 있는 잠재성과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듣고 순종하기 때문에 결국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 13:34)라고 전함으로써 무리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적 메시지를 결론 짓습니다.
마 13: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곧 비유가 계시의 도구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비유는 사람들에게 다시 생각해 보도록 도전을 주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이 어떠한지를 볼 수 있는 거울이 됩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제자라면 그 말씀에 반응하고 들려주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자 그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행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와 함께 사람들이 곱씹어 생각할 수 있도록, 그래서 스스로 수수께끼를 풀도록 도와야 합니다. 비유에서 천국의 비밀에 대한 그의 계시는 구원과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밝히십니다. 무리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의무는 예수님에 대한 반응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들은 비유를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그의 제자가 될 것이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유를 들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져오신 천국과 관련하여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결국 비유의 말씀을 통해 ‘당신은 예수님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설교동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자씨와 누룩비유: 마 13장 31-33절 (2) | 2023.06.04 |
---|---|
가라지를 뽑아버릴 수 없을까요? 마 13장 24-30, 36-43절 (2) | 2023.05.08 |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첫번째 만남이야기: 요 20장 19-23절 (1) | 2023.04.25 |
예수님 앞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 마 21장 1-11절 (1) | 2023.04.25 |
하늘 가족의 조건: 마 12장 46-50절 (0) | 2023.03.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