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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거듭나셨습니까? 요 3장 1-15절

by 최수근 2019. 4. 6.

2019년 4월 7일 주일설교문

[거듭나셨습니까? 요 3장 1-15절]

최수근 목사

거듭나셨습니까? 요한복음 31-15

우리는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첫 표적에서 변화의 주체가 예수님이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전으로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어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을 깨끗하게 치워내야 함을 또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처럼 가장 된 나 자신의 위선과 집요하게 나의 유익을 추구해가는 것들을 내려놓고 본래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일회적으로 완결되는 일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헌데 이 지점에서 또 우리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적인 나의 노력인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뭔가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강박감이 우리의 신앙을 누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경건한 사람들의 관심사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부자 청년 하나도 찾아와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은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는데도 여전히 뭔가 행동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자신이 돌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팽이 같은 심정으로 서 있습니다. 구원에 이름이 자신의 선택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은혜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도 그 당시 경건한 자들이 갖고 있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최고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으며 바리새인이었고, 따라서 율법과 순수한 믿음에 대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아주 존경받는 선생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낮에 예수님과 이야기할 시간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남몰래 예수님에게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두 가지 목적이 다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치를 보든, 아니든 간에 주님을 찾아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민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디에 답이 있는지 알고 해결점이신 예수님 앞에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는 랍비로서 그와 같은 자신의 갈증을 처음부터 젊은 예수에게 털어놓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중하게 높여드리는 말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보고 랍비라고 부르는 것은 그 당시 상황에선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랍비가 되려면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아야 하고, 나이도 40세가 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기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임을 인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바라본 수준은 예수님이 랍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특별한 수준의 랍비였을 뿐 메시아에 대한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찾아왔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다른 이들에게 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던 것과는 대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아니더라도 랍비라고 부르며 예수님께 다가온 니고데모는 그래도 내심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말을 듣게 될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볼 수 없는 니고데모의 한계를 곧 바로 지적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답변에 크게 놀라 당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니고데모에게 가장 큰 영적 문제가 거듭남의 체험이 없는 것임을 보셨습니다. 그에게 종교적인 경건함과 헌신과 열심, 열정은 있었지만 그것은 생활적인 습관의 형성이었지 물이 포도주로 변화하듯 질적이고, 내적 변화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적 행위, 즉 행함이 갖는 한계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을 위해 열심을 갖게 되면 갖게 될수록 짐은 더욱 가증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거듭남으로부터 시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니고데모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랍비 운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나지 못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면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을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길 수 있는 은총의 영역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니고데모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적 행함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거듭남은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 어떤 놀라운 행동이 이어진다고 해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겐네데 아노덴위로부터 태어나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위로부터란 하나님으로부터란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나다라는 말 대신에 위로부터 나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생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서 오는 것이고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종교적인 열심만을 갖고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목마름이 더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영적 목마름이 있기에 그 밤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필요를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랍비여 운운하고 있는 니고데모를 꿰뚫어보신 주님께서 그의 정곡을 찌르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좀 솔직해졌으면 합니다. 나의 가장 긴급함을 주님께 정직하게 올려드릴 때 주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에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니고데모는 신중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무지한 말로 반문하고 맙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는 것입니까?” 니고데모는 거듭남의 의미를 또 다른 육체적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앞에 말씀을 디테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나야 하는 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고, 그렇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은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세례는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그와 함께 성령세례를 통해 우리는 성령님의 다스림에 전적 순종으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성령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로움을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의 주체이신 성령 안에서 삶이 전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포지션이 달라지고, 정체성이 달라지고, 그로 말미암아 언어와 행동과 생각과 관계와 재정 등에서 다른 차원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은, 위로부터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계속해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곳에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자녀가 아닌데 어찌 상속할 수 있습니까? 거듭나지 아니하면 외인인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세상의 자녀는 끝까지 세상의 권세 아래 있기에 썩어질 육일뿐입니다. 이렇게 세상적인 것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을 알고 거기에 자기의 몫을 차지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거듭나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지 아니하면 외적으로는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속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추수 때에 알곡이 아닌 버려지는 죽정이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유대인의 선생 니고데모가 놀랍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꿰뚫어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말씀의 권세에 놀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추구하는 바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에 심히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영적인 사건인 거듭나는 기적은 그 발생이나 그 결과에 사람이 어떻게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신비를 바람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니다. 바람이 어떻게 생겨나며,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것은 고대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수수께끼였으며 기적이었던 것처럼 거듭남은 하늘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제서야 니고데모가 놀라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10-11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은 분명히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이미 말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종말 때에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와, 또 이 일은 당연히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사실을 구약 성경을 통해 들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이론적인 지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천적으로 실존적으로 그 문제에 부딪치게 되자, 그의 지식은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의 조명 없이는 우리는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듣고 보는 사람들의 불신앙적인 태도 때문입니다. 전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믿지 못했듯이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것들을 깨닫지도 못하고 수용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하늘의 일을 말씀 하시는데 그것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12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그래서 위로부터 태어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주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알고 무릎 꿇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을 귀 또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하늘로부터 난 자들만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일어나 사건(21:8-9)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을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도 들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놋뱀이 들림을 보고 바라본 자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왜 필요합니까?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육신 하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분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지고 저주받아 심판을 받고 죽어서 우리의 죄 값을 대속하는 수밖에는 우리를 중생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15절은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도록 해 놓을 테니까 믿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그 방법 밖에는 없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이냐, 선택하지 않을 것이냐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 죄 값을 치르는 대속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방법론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앙의 확신 부분에서 맴돌게 됩니다. 자신의 신앙이 자기의 기준과 기대만큼 만족스럽지 않을 때마다 내가 이러면서도 예수를 믿는 것이 과연 내게 무슨 효력이 있을까?’고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십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붙잡으셨고, 그가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놓지 않는 한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는 자라는 확신이 우리에게 늘 있어야 합니다. 그 확신이 있을 때 변함없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 우리들이 오늘도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우리가 찬송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성경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령에 의한 중생이라는 진리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란, 구원은 하나님의 은밀하고 능력 있는 작용에 의해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단지 각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중생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시각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거듭났든가 죄 가운데 죽어 있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또 빛으로 왔든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든가 둘 중 하나이며, 정죄함으로부터 구원받았든가 정죄함을 받고 있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중도란 없습니다.

결코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듭남의 주체도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전적인 은혜이고 신비입니다. 그 은혜 가운데 있지 못하면 우리는 현실에서도 지옥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종말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도 심판과 지옥뿐입니다. 하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삶이라면 우리는 오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그 권세를 부여받아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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