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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성전을 깨끗이 하라: 요한복음 2장 13-22절]

by 최수근 2019. 3. 30.

2019년 3월 31일 주일예배 설교문

[성전을 깨끗이 하라: 요한복음 213-22절]

최수근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의 주제는 변화였습니다. 변화의 주체가 주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언제 변화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하심 앞에 순종할 때입니다. 주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아닌 그 외의 것들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변화한 척 하는 것입니다. 그건 위선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렇게 살다보면 본인도 위선이 진짜인 것처럼 믿고 살지만 그 본래의 모습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가 전부요 완성이 아닙니다. 거기에서부터 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두 가지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죄로부터 정결케 되는 것과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죄에 대해 죽은 자이고, 12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예배자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헌데 우리는 마냥 내가 예수님을 믿어요,” “교회에 나가고 있어요,” 말하면서 자신이 잘하고 있고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죄로부터 정결, 영적인 예배의 회복, 12:1이 말씀하는 신령하고도 주께 합당한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의식적 행위도 실은 무의미합니다.

이건 과거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 부른 민족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세워주셨습니다. 출애굽 당시 열 번째 재앙인 모든 초 태생의 죽음의 재앙을 앞두고 하나님은 사망의 재앙을 피하도록 백성들에게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문 인방에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여호와의 유월절이라 제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절기를 기억하고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또 레위기 1-10장까지에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법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더불어서 레위기의 성결법전을 통해 예배자로서의 거룩한 삶에 대해서도 요구하셨습니다.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형식을 담아내는 우리의 모습 또한 거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예배와 절기는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고 사람에게 주목한 결과입니다. 그로 인해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은 그들의 타락한 예배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거절되었습니다. 열심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거절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70년의 포로생활을 통해 회개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 후 영적갱신이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그래서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 율법의 말씀을 청종했지만 신구약 중간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율법적 삶이 아닌 자신들을 위한 예배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해주신 유월절은 더 이상 출애굽기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유월절이 아니었습니다. 유월절은 단지 유대인의 유월절일 뿐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유월절과 유대인의 유월절 차이를 우리는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결코 예배 중심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예배의 모습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들을 보셨습니다. 14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물론 희생 제사를 위해 드릴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소와 양, 비둘기가 당연히 거기에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에게 적합한 거룩한 화폐로 헌금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짐승을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편의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한 편의였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성전에 이방인이 들어갈 공간을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거기에서 그들을 위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만민을 위한 자리어야 하는데 자기들만의 독선적인 자리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주님이 찾으시는 거룩한 예배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격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함 앞에서 결코 온순한 분이 아십니다. 15-16절에 보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채찍질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고, 상을 엎으셨습니다. 비둘기파는 사람들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한마디로 이방인의 뜰에서 난장판을 만드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거리 모퉁이에 있는 어떤 교회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예배와 음악, 정치와 사회, 민족의 경축과 탄식의 중심지였습니다. 민족의 구심점이요 민족의 생활에서 구심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살기로 약속하신 곳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곳에 예수님이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뒤엎어 놓았습니다.

게다가 이 일은 예수님 혼자 하신 일입니다. 사람들이 어어 하면서 그 일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쉽게 사람들이 제압하지 못했고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불타는 열심에 사로 잡혀 계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하늘의 강력한 힘인 것입니다. 거기에 놀란 제자들도 마음속으로 시편 69:9의 말씀을 상기합니다. 17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예수님은 왜 이렇게 행동하셨을까요?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점잖고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지만 다른 공관복음서를 보면(마태복음 21:12이하) 강력하게 비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 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예레미야 711절의 말씀이 인용되면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거기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강도의 소굴일 뿐이었습니다. 주전 6세기 예레미야가 바라보던 타락한 성전일 뿐이었습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것처럼 이미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간 종교의 터전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며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배의 자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항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리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흠 없는 제물이 준비되어야 하고 성소의 세겔로 환전되어야만 하나님께 봉헌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명확하게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그건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너희의 유익을 위한 것일 뿐이다.”

예수님이 지금 본질을 꿰뚫고 보시는 것입니다. 이미 성전은 부패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상거래, 시장 바닥 같은 분위기는 결코 성전에 있어야 할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배는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드리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가 훼손되어 있다면, 진정 예배자가 아닌 강도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라면 그것은 이미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적절하거나, 피상적이거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거나, 냉냉 하거나 활기가 없거나, 엉성하거나, 제멋대로이거나, 위선적이거나, 신학적으로 부적절하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도 예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와 함께 예배자들의 자기 과시와 자기선전을 위한 관심 때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이 손상되어 버리는 예배도 마찬가지로 엄중하신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사건에는 예수님의 사명과 사역의 동기가 의미심장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 격렬한 대결에서 폭발하는 그 분의 마음의 열망은 아버지의 영예, 곧 성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 의해 손상되고 있는 아버지의 영예에 대한 열심 때문에 더욱 불타오른 것입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다면....그 열망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전정화의 문제를 단지 한국교회의 개혁, 정화의 문제로만 확산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먼저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내가 깨어져야 합니다. 내가 먼저 정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입니다. 우리의 삶은 곧 예배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오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으로 불러주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분의 뜻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심히 가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부름 받은 성전으로서의 우리가 죄와 악과 온갖 종류의 그릇된 개념이라는 우상들로 가득 차 더러워져 있다면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향해 마음이 분하여야합니다. 소 닭쳐다보듯 서 있으면 직무유기입니다. 우리 안에 더러움을 뿌려놓은 사탄 마귀 권세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능력, 권세를 힘입어 우리 안에 영적인 오물들을 깨끗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거룩한 분노의 채찍질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편의를 위해, 유익을 위해 품고 있던 것들을 몰아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이 일을 감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에 대한 열심뿐 아니라 그 분의 백성과 그들의 예배를 새롭게 하는 것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으셨기에 성전을 뒤집어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정결케 해야 합니다. 그분을 힘입어 우리는 참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예배의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도록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금 영광의 자리로 가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예배의 회복을 이루심으로써 오늘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으로 이루어가도록 하신 주님께 결단합시다. 주님, 우리 안에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고,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게 하소서. 거절되는 예배가 아닌 흠향하시는 예배 되게 하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의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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