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주일예배설교원고

와서 보라: 요 1장 29-42절

by 최수근 2019. 3. 16.

2019년 3월 17일 주일예배설교문

[와서 보라: 요 1장 29절-4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질문이 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헌데 문제는 묻다가 끝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도 이와 같은 이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궁금한 점이 많았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와서 네가 바로 그냐? 메시아냐? 선지자냐? 도대체 누구냐? 요한에게 묻기만 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선 메시아의 약속이 오랫동안 이어왔고, 약속된 메시아가 곧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세례요한을 보니 그 약속이 성취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와서 너는 누구냐고 계속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그쳤습니다. 세례 요한이 메시아도 선지자도 아니라고 부인하며, 곧 자기 뒤에 오실 이에 대해 증거 하는 것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궁금하니까 가서 기웃거리지만 거기에 그 어떤 변화, 열매도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의 대중적 시선에, 사람들의 기대를 자신의 능력으로 충족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도 있었습니다. 충분한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가리 웁니다. 우리는 그의 놀라운 겸손을 주목해야 합니다. 치켜세우려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은 단지 소리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비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만을 철저하게 의식하였고, 자신이 아닌 메시아를 증거 했습니다. 오늘날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면서 세례 요한의 모습이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밀치고 자신이 모든 것이 누리려고 한다면 그 끝은 분명해집니다.

자신이 소리임을 자각하고 있는 세례 요한에게 어느 날 예수님이 다가왔고, 예수님께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열어놓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자기부인과 증거를 통해 말씀이신 예수님과 사람들이 연결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영원하신 말씀의 영광이 일상생활의 한 가운데 있는 평범한 사람들, 다시 말해 그 당시 요한의 독자들 같이 인간적 필요를 갈급해 하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이 땅에 낮아지심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고뇌를 한데 결합시킵니다. 요한복음의 공동체는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하여 그동안에 받고 있던 보호막이 걷히면서 거대한 로마제국의 폭거 앞에 선 이들이었습니다. 황제숭배를 거부함으로써 가해지는 고난의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그들이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한복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1장에서 그와 같은 일대일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나 자신이 직접 주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집단적으로 묻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까지 물음표를 달고 가시렵니까?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느낌표를 회복해야 합니다. 요한을 따르던 두 제자가 그러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심을 보고 말하였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인간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배신입니다. 자기 스승을 두고 갑자기 자기 스승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고 그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배신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따라갔습니다. 왜 따라갔겠습니까? 또 그 상황에서 보내는 세례 요한의 마음이 씁쓸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움직임을 순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한 것은 메시아의 사역이 자신의 사역을 능가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자기 한계와 자기 부인의 선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확신이 세례 요한에게는 손상을 입히는 행동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만합니다. 제자들에게 대놓고 가라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안드레가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예수님에게 감으로써 세례 요한은 충성되고 재능 있는 제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다른 제자 역시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는데, 그는 아마도 이 복음서 기자인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전례 없이 무너지고 있는 이때야말로 모든 초점이 주님의 영광으로 귀속되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세례요한을 조명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우월성에 대한 관심과 모든 인간적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 분의 대의를 촉진시키겠다는 불타는 관심으로 자신의 개인적 야심과 인기는 기꺼이 저당 잡힐 준비가 되어 있는 설교자가 몹시도 필요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니체가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진 그 당시의 도전은 오늘 저의 마음에 불편함을 줍니다.

당신이 구속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의 구속주를 믿겠소.”

이와 같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로 가는 장면들은 서론에 나와 있는 주장,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았지만, 믿고 새 생명을 얻은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하는 주장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기적입니다. 다 막힌 것 같지만 그 사이에 생명의 오솔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돌이켜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표면상으로 보면 이것은 단지 예수님에게 분명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지만, 여기에는 더 심오한 함축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도 조만간 이와 동일한 질문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에게 혹은 그 분으로부터 정말 무엇을 원하는가? 여러분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엄격히 말해서,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동기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은 위선적인 비현실성에 대한 건전한 도전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매 단계에서 부딪히는 엄중한 질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새로운 경험의 기로에 설 때마다 우리에게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을 들이대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정말 솔직하게 그 분 앞에 서야 합니다. 위선떨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즉각적인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또 그들이 헌신하기 전에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39). 이것은 복음을 듣자마자 즉각 반응을 보이는 것만이 올바른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지나치게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이 동문서답하듯 대답하였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주님께서 관심을 표명한 안드레와 한 제자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라!”

묻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와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변을 뱅뱅 돌아서는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보고 만져보고 느껴보아야 합니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고, 떨리는 손으로 만져보아야 합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을 좇아가서 그 날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주님의 영역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안드레라는 제자가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아갔습니다. 가서 전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안드레가 그의 형제 시몬을 데리고 온 것은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의 증거에 대한 고전적 모델이 되어 왔습니다. 자비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증거는 내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시몬도 즉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그의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이름에는 인격이 들어가 있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셨듯이 시몬에서 베드로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매번 사람들을 잠재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시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의 증거 대상이 되는 사람의 죄와 타락을 밝히려는 관심 때문에 그들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침해받아서는 안 됩니다. 미래의 잠재력에 대한 환상은 그 잠재 능력을 실현하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선입견을 우리는 제거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부르고 계십니다. 이 말은 오늘날 각 나라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들을 통해 전 세계에 울려 퍼집니다. 이 말은 안드레처럼 그늘에 가려 있는 사람들에게도, 베드로처럼 격정적인 장래 지도자들에게도, 나다나엘처럼 진지하고 순진한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그 외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도 미칩니다. 저들은 진지하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비록 세상은 여전히 그를 알지 못하지만’(10), 그분께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헌신합니까? 예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보는 것입니다. 함께 동행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자신을 분명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옛날 수많은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누구나 나사렛 출신의 사람(46)이신 예수님이 우리가 사는 현대 세상의 혼잡함과 소란스러움 가운데서도, 하늘의 충만함과 땅의 필요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거기에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와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면 변화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이루어주십니다. 시몬이 베드로로 변한 것처럼 주님을 만나고 그 분을 알고 따를 때 우리에게도 새 이름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 안에서 발견하신 그 무한한 가능성이 예수님으로 인해 풍성한 열매로 드러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