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4일 주일예배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 14장 13-21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개발 협력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가 내부는 물론 국가 간 불평등이 심화하고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피해가 집중되는 등 양극화가 심각하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재산 소유와 공정한 소득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제적 불평등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는 세계 다수의 국가에서 역대 최악의 경제적 불평등을 증폭시켰고 팬데믹 이후 경제가 회복돼도 상당 기간 경제적 불평등의 위기는 깊어질 것입니다.
국제구호단체인 옥스팜은 ‘불평등 바이러스’라는 보고서를 통하여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에서 수억 명이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 감소로 세계의 빈곤층이 경제 손실을 극복하는 데 10년 이상 걸릴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을 제기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사태는 더욱 심각하여 최근의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현상은 이미 임계점을 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세상처럼 보이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매년 기아로 사망하는 인구는 최소 210만 명에 달합니다. 이는 빈곤으로 인한 수많은 죽음의 한 형태이며, 매일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습니다.
빈곤이라는 가혹한 현실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이곳 한남동과 이태원만 하더라도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이주민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섬기고 있는 아프칸 가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에 일자리가 끊어지면 저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합니다. 이런 형제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아버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는 말씀이 우리의 귓전을 때립니다. 가만히 있지 말라는 말씀인거죠.
구약성경에서도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한 높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였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추수 때의 배려도 잊지 않도록 독려하곤 하였습니다. 추수할 때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삭을 남겨놓으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있는 이들의 세상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들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는 당시 사회에 기득권층이 아니었습니다. 소외된 자들이었고,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저분이 바로 고대하던 메시아이시라면 세상을 바꾸어주실 거라는 기대였던 거죠.
어느 날 빈들로 이동하시는 예수님이 무리의 눈에 포착되었고,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모여오기 시작했습니다.
마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그렇게 모여든 큰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중에 병자를 고쳐 주시기도 했습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었고 이 많은 무리의 식사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무리가 모여 있는 곳은 빈들이었습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을은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해법을 제시하였습니다.
마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제자들은 가장 선택하기 쉬운 방법을 택했습니다.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겁니다. 제자들에겐 최고의 방법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해법이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무리가 가서 사 먹을 것도 없었고, 실은 사 먹을 돈도 없었을 것입니다. 있었다면 그들이 나름 도시락이라도 준비할 건데 전혀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던 거죠.
제자들은 지금의 상황을 자기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건 자기들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밥을 사 먹는 일은 저들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저들로 마을에 가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문제에 직면해서 회피하려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냥 사회적으로 알아서 해결될 문제 아닌가” “우린 육적인 음식보다는 영적 음식을 주는 기관이야”하는 생각들을 교회가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예수님은 이 문제를 다르게 접근하셨습니다. 이것은 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로 전환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 14: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갈 것 없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 말씀은 세상의 문제 앞에 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답답하여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마 14: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여기서 수치를 이야기한 것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갖고 있는 재원은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해법은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 답답한 제자들의 소리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제한된 재원을 가져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마 14: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한정된 재원이지만 우리의 손을 떠나 우리 주님에게 주어졌을 때는 다른 차원이 열리게 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한 얼마되지 않는 것을 아까워하며 타자를 위해 넘겨드리지 못합니다. 그것을 넘겨주고 나면 자기도 막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있는 그것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해결의 길은 결코 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예수님께서 주어진 것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무리들에게 직접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먼저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다고 했던 제자들은 다시 무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한정된 양식이 끊임없이 손길에서 넘쳐나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 14: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많은 사람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게다가 빵조각이 열두 바구니나 남았습니다. 먹은 사람은 무려 오천명이었습니다.
마 14: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예수님은 메시아 축제를 벌이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제공한, 보잘것없고 불충분한 재료를 취하신 후에 그것들을 계속 수천 배로 증가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처음보다 끝날 때 더 많은 것이 남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메시아의 권능이며, 복음입니다. 우리의 작은 헌신이 그리스도를 만날 때 비로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오병이어의 사건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기적을 베푸셨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 기적은 수많은 군중의 기아에 대해 초자연적으로 식량을 공급하는, 종말의 축복을 예시하는 메시아의 양식 공급 이상의 실제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단지 기적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이건 굶주리고 있는 세상을 향한 우리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문제를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문제 앞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제한을 움켜쥐고 있는 한 그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제한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 우리 손에 있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에게 그것의 주도권을 넘겨드렸을 때 그것을 통해 우리 주님이 일하시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문제에 도움을 주실 수 있는 근원이라는 것을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포인트를 놓치면 우리의 작은 행동 없이 그저 오병이어만을 꿈꾸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큰 무리를 먹이심은 마태의 교회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쁜 소식의 전조입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이 기적이 공유될 수 있고, 이 나눔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밥퍼 공동체”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지난 35년 동안 1400만 그릇을 나누었습니다. 많은 교회의 성도들이 이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청량리 일대가 개발되면서 대형 아파트들이 주변에 생기고, 남루한 사람들이 줄을 서 밥을 먹는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단지 집값 떨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일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특히 2022년 7월 동대문구 구청장 한 사람이 바뀌면서 참으로 부당한 일로 억울하게 철거명령과 이행강제금 2억 8천여만원을 부과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밥퍼 공동체 최일도 목사님이 밥퍼 철거 반대, 양성화 지지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우리 주님은 우리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눔의 자리를 지켜내고 확산해 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가장 궁핍한 곳에 선교 사역을 집중해야 하며, 중심으로부터 주변을 향해, 죄의 희생자가 된 사람에게, 다시 말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막 14:7)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가난을 묵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고”(신 15:11) 늘 있다는 구약의 진술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아낌없이 베풀도록 권고하셨습니다. 그 결과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게”(신 15:4) 하시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정의가 확립되고, 가나안 자들이 빈곤이 주는 모욕에서 벗어나며, 자원을 자발적으로 나눔으로써 물리적 궁핍이 사라지는 단 하나의 공동체가 있다면 그 공동체는 바로 메시아 예수의 새로운 사회일 것입니다.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핌합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속에 거하겠느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작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 같은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작은 헌신으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가시는 사랑의 역사이고, 그 일에 예수님은 우리가 언제나 헌신하기를 기뻐하신다면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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