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31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 5장 16-26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간과 세상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은 인간 스스로 변화하여 신적 경지, 곧 신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내면의 정화를 통하여 신과의 변형 일치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자인 플로티누스는 “영혼이 정화하면서 형상과 로고스가 되고 모두 비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되어 결국 전적으로 신적인 것에 속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플로티누스가 말하는 정화는 영혼이 스스로 육체로부터 오는 욕구 등을 제거하고, 물질적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은 죄인’이라고 선포함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영혼과 정신의 정화를 통해 완전함으로 나갈 수 있다는 세상의 사조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선 인간은 땅으로부터의 의가 아닌 하늘로부터 임한 새로운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내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져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여겨지는 은총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끝과 완성은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탄은 포기하지 않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실족시키고자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의 은혜를 입었지만, 끊임없이 믿음의 길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처럼 살 때,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감격도 잠깐, 광야에서 하나님을 수차례 시험하다가 심판을 받습니다. 출애굽 당시 20세 되는 성인 가운데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살아 남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다른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행했던 역사를 예로 들면서 고린도교회에 경고를 하는 말씀이 바로 고전 10:12 말씀입니다.
우리도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의 마당이 사탄에게 뚫려 있다면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넘어짐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구원의 길에서 성령님은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빛을 비추어주시고, 강한 손길로 성도를 견인해주십니다. 우리 안에는 구원의 길로 스스로를 이끌고 갈만한 어떤 원동력, 에너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 만의 힘으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행 1:13-14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그렇게 기도할 때 오순절에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성령 받은 이후 제자들은 모든 면에서 달라집니다.
이처럼 처음 교회 공동체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이후 성령님은 우리 성도들을 이끌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우리 영적인 힘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와 함께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출발점입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18절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25절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 다 같은 의미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자의 삶입니다. 주체가 내가 아닌 성령님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닌 언제나 계속되어야 하는 행동입니다. 순간순간 이 마음의 결정이 느슨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기도해도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은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성령을 따라 행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성령 안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령을 따라 행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체의 욕심을 이루고자 할 것입니다. 그냥 본능에 따라가는 겁니다. 주변을 둘러보시면 이런 것들이 보일 겁니다. “욕심쯤이야”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은 작아 보이는 욕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처음부터 사망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욕심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육체의 소욕은 언제나 성령을 거스르게 되어 있어요. 추구하는 목적이 달라서입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이 아닌 육체의 소욕에 귀를 기울이면 마땅히 그리스도인으로서 맺어야 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저 육체의 일에 빠져들 뿐이고, 19-21절에 나열되고 있는 육체의 열매가 열릴 뿐입니다.
은혜를 받고 성령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이 지점에서 타락한 본성, 옛 사람의 자아를 못박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유권을 끝까지 우깁니다.
그렇게 빠져드는 육체의 일은 19절부터 21절까지에 걸쳐 나열되고 있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맺어서는 안 될 탐욕과 정욕과 타락한 본성의 열매들,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결국 이것들 외에는 맺을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심고 있는지, 즉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행동하는 지에 따라 열매는 정확하게 맺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주신 것도 바로 이런 악의 연결고리를 끊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분명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그래서 십자가 위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공존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열매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열매, 기뻐하시는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은 그 열매를 칭하기를 성령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단어들을 들어보면 느낌이 서로 다릅니다. 육체의 일은 목록의 단어 자체가 사람들의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소름이 돋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에 대한 목록은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사랑을 들으면서 화평을 들으면서 화를 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그래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고자 한다면 나의 동선에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악영향, 상처, 죽음을 초래하게 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와 함께 그 열매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영원히 소외될 것입니다. 갈 5:21b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결국 가짜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진정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라는 증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로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성령님의 사람입니까? 성령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직 성령으로 행하십시오. 성령으로 살아가는 길에 헛된 영광, 썩어질 영광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일 뿐입니다.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시다. 자기 영광을 구하다 사람들은 서로 마음 상하고 다투게 되죠. 갈 5:25-26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열매를 따 드시기 위해 무화과나무로 가셨지만 그 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하였지, 따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화려하게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실 때 어떤 열매, 맺어야 할 열매가 과연 맺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음으로 참된 생명에 연해 있음을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열매는 영생입니다. 갈 6:8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리라.” 영생의 열매가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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