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31일 주일예배
[그런즉 깨어 있으라:마 25장 1-1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바둑 대전을 치르고 나면 전체 바둑판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는 복기 시간이 있습니다. 그렇듯 지난 한 해 걸어온 길과 그래서 오늘에 이른 하나하나의 선택의 결과를 되돌아보는 복기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시인은 그런 지혜를 위해 기도하죠. 시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그렇게 되돌아볼 수 있을 때 내일에 새로운 선택에서 반복되는 실수가 아닌 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신앙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이 모든 돌아봄의 과정이야말로 깨어 있어 그날을 준비하는 삶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데 뭔가를 하려고 해도 너무 늦었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부터 시험이 시작되는데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이런 끔찍한 말이 주님의 재림에 적용될 때만큼 무서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마지막 때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어가고 있는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는 마 24장 42~44절에서 그날에 대한 준비성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기치 않을 때에 주님이 오시겠지만 그럼에도 그날을 예비해야 하는 것이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다른 하나는 변함없는 신실함입니다. 예수님은 24장 45~51절에서 이 영역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서 책임의 검증은 주인이 집을 비웠을 때에 발생합니다. 주인이 없다고 해서 대충한다면 그에 대한 주인의 태도는 분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주인이 돌아올 때 그는 더 많은 책임이 주어질 것입니다.
마 24: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반면에 악한 종은 생각하는 겁니다. “주인이 더디 올 건대 내 마음대로 하자” 실컷 즐기자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사악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예단한 데서부터입니다. 아마도 이 악한 종은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자신의 악을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나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의 주인이 이르렀을 때 악한 종은 어찌할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주인의 엄벌뿐입니다.
예수님은 24장의 이야기를 25장에 열 처녀 비유를 통해 확장하면서 참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날을 예비함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25장 1-13절의 열 처녀 비유는 이스라엘의 결혼식을 배경으로 합니다. 일반적으로 그 당시 결혼 풍습은 신랑이 신부 집에 들러 간단한 종교적 의식을 치른 후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을 데리고 자기의 집으로 가 혼인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결혼식에서 신부는 열 명의 들러리의 도움을 받습니다. 들러리가 된 열 명의 처녀는 신부의 집에서 신랑을 맞이해야 합니다.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상황과 같다는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우리가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준비성(24:42-44)과 신실성(24:45-51)의 주제를 개진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인자가 언제 오실지 알 수 없는 시간에 비추어서 특히 준비성을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부를 동반해서 신랑 집까지 행진을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식에는 평소보다 많은 등불의 기름이 필요합니다. 신랑집까지 가는 내내 불을 밝혀야 하며, 신랑집에 도착해서 횃불 춤을 출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을 위해서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결혼식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들러리의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들러리의 절반은 미련하고 절반은 슬기로운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50대 50입니다.
마 25: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열 명의 처녀가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련한 자들과 슬기 있는 자들은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느냐입니다. 바깥에서 사용하는 등은 불을 밝힐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기름을 담을 수 있는 다른 용기를 준비하여 등이 꺼지지 않게 해야 했습니다.
마 25: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마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미련한 자들은 따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갖고 있었습니다. 혹시 신랑이 늦어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가 이들의 상황을 가름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예기치 않았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왔어야 할 신랑이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마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게다가 오랜 기다림은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 모두 피곤하게 하여 잠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간격의 상황을 조명하려는 세부 설명이지 정죄의 대상은 아닙니다. 여기서 졸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신랑을 기다리던 들러리들이 모든 잠들었고, 시간이 지나 한밤중에야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마 25: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한밤중에 도착한 신랑을 맞으러 나가기 위해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기에 행렬을 밝히는 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다섯의 처녀들에게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시간이 늦어지면서 다섯 처녀가 들고 있던 등의 기름이 거의 소진된 겁니다. 아마도 미련한 처녀들은 통상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만큼의 기름을 가져갔을 것입니다. 책임은 늦게 온 신랑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기름이 부족한 처녀들이 슬기 있는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마 25: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마 25: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그러나 슬기 있는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그 일을 수행할 거로 생각했는데 야박하게도 단박에 거절하죠. 기름을 나누어주면 자신의 등도 꺼질 수 있었고, 그러면 자칫 결혼식을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은 차라리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말하죠.
마 25: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미련한 처녀들의 기름이 떨어진다고 해도, 슬기로운 처녀들의 기름으로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들러리들의 할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다섯 명의 처녀는 기름을 사러 가게 되죠. 늦은 시간에 기름을 사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그녀들은 기름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기름을 구하러 나간 사이에 신랑의 행렬이 마침내 도달했고 그곳에 있었던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잔치 자리의 문은 닫혔습니다.
마 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우리가 빌릴 수 없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그것을 준비하고 소유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은혜와 거룩함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다섯 처녀를 슬기로운 자들이라고 일컬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결혼 잔치에 신랑과 같이 가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적절하게 준비된 사람들만이 잔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은 닫힌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름을 사러 갔던 어리석은 처녀들이 마침내 도달하지만 그래서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이었습니다.
마 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마 25: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기꺼이 신부의 들러리가 되기로 했고, 등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습니다. 책임은 늦게 온 신랑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비유는 신랑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칭하며 문전 박대하였습니다.
들러리로 초대받은 그녀들은 신부와 밀접한 관계였지만 결국 그녀들이 들은 말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신랑 되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여 맞이하지 못한, 그래서 그분과 참된 관계를 갖지 못한 이들에 대한 단호하고 직접적인 거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선택한 사람들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모른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단호한 거절 앞에서 미련한 이들은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비유의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서 매우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 있는가, 준비되어 있는가, 이것은 두 유형의 사람들을 가르는 기준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인자의 도래를 깨어 준비할 것입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의 운명은 닫힌 문 바깥에서 기다리게 됩니다.
결혼식의 즐거움은 그 즐거움을 준비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결혼식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준비의 중요성을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름 없이 들러리가 된 처녀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여분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의 모습인가요?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이 버릴 것을 계산하고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버릴 것을 계산하지 않고 믿음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는 기름 없이 들러리가 된 처녀와 같습니다. 준비와 계산은 원하는 일을 끝까지 할 수 있는 동력입니다. 믿음이란 주먹구구식으로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버릴 것을 계산하지 않은 믿음은 온전한 믿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단지 부끄러운 욕망일 뿐입니다.
믿음은 이전 것을 버리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빌 3:8b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기대어 살아오던 모든 것이 흔들려야 비로소 새로운 믿음이 들어갈 자리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믿음은 버리는 과정에 따르는 혼돈과 갈등을 겪어 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느 것도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가치와 질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할 것이고 비로소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계산해야 합니다. 잘못된 계산을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지 예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잘못된 계산을 한 미련한 처녀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책임이라는 말은 현재적 삶과 미래적 삶을 연결하는 단어입니다. 미래에 대한 계산으로 현재적 삶을 살아냄으로써 현재적 삶이 미래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이 책임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기름을 준비하라는 말로 우리의 삶에 도전을 줍니다. 그러나 기름을 준비하는 것을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업적들을 쌓아 두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또한 미련한 계산일 뿐입니다. 이건 우리의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많이 준비했다는 것은 그만큼 비우고 그만큼 버렸다는 뜻입니다. 버리지 않으면 신부의 들러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위해서 무엇을 많이 할 생각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우리에게 어떻게 결혼식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온전히 우리의 문제이며 우리의 선택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산할 것을 계산하지 못한다면 결혼식은 없습니다.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기다렸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정도의 기름을 준비하는 것도 힘들었다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온전히 들러리의 책임입니다.
믿음의 기름이란 더 많이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버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하게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아직도 수많은 것을 내려 놓지 못하고 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할 것인지를 상상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참으로 깨어 준비된 자로 언제나 주님 앞에 설 종말론적 신앙의 삶이어야 합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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