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12월29일 주일설교동영상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엡2장11-18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한 해를 돌아보며
멋진 한해를 꿈꾸며 숨 가쁘게 달려온 날들이 서서히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올 한해를 돌아볼 때 여러분 만족하고 감사합니까? 아니면 아쉬움과 후회로 가득한 한 해였습니까? 한 해를 돌아보면서 많은 이들이 만족하고 감사하기보다는 아쉬워하고, 후회하곤 합니다. 이렇게 아쉬움과 후회함으로 한해를 돌아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지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가 지나간 시간에 대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과거와 현재,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서 매우 자유롭지 못한 영혼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과거는 주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는 주님의 사랑에 맡기고, 미래는 주님의 섭리에 맡겨라.”
우리 자신이 다 한 것 같지만 돌이켜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우리의 지나 온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쉽게 판단하고 풀 죽어 사는 삶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은혜 안에서 참으로 복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나를 보고, 부족했던 나의 모습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나의 허물을 던져 드리고, 그런 나를 품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주님을 힘입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고 있는 것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점을 늘 생각해야 했습니다. 주께서 누리도록 하신 은혜는 무엇인지 점검해보고, 그것들을 자신의 누림으로 삼을 때와 전혀 그 누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가는 신앙의 길은 그 편차가 커도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서2장11-18절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 밖에 있던 때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삶이 어떠한지 생각하도록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우리들이 어떤 환경에 있었는지 신앙적으로 깊이 생각해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우리를 부르시고 변화시키신 후에 이루어낸 결과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고,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충실하게 그 은혜들을 누리며 살아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잊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가한 상처들, 또 내가 실패했던 순간들,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던 최악의 상황들, 이런 것들은 깨끗이 잊어버려야 합니다. 더 이상 이 일들은 묵상하지 마십시오.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고 은혜를 묵상해야지 늘 부정적인 것들만 묵상하니 우리의 삶이 쪼그라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로서 우리는 자신의 부족했던 지난 시간들은 모두 주님의 자비하심에 맡기고 다시 앞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도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죄과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왜 우리가 벗어던지니 못합니까? 이걸 벗어나지 못하니까 삶이 피곤하고, 우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소외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 전,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때를 기억할 때 거기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또 그와 같은 어둠의 자리로 다시금 돌아가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12절에 말씀에서 그 때 영적으로 수많은 상실가운데 있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우리는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구원의 은혜 안에 있지 못했습니다. 은혜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통치하심 가운데 있지 못했습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기에 우리 안에 그 어떤 약속의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처럼 바라볼 것이 없으니 당연히 세상에서 소망도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된 고독한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기 전 가공할만한 5중의 상실상태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어 마음의 공허함을 세상 속에서 찾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들이 쫓던 세상은 마음의 갈망을 채워줄 수 없었습니다. 늘 목말랐기에 육체의 욕망,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끊임없이 심취하고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영적인 공황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불러내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쁨을 주셨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까워짐
멀리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통해 너무도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선물은 친밀함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3절에“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하였습니다. 과거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친밀한 교제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도록 하셨는데, 올 한해 하나님께로 늘 가까이 나오셨습니까? 이 친밀함을 누리셨습니까?
물론 부모님과 친밀함을 누리지 못했던 분들이 종종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께 투영되어 엄격하신 하나님, 정죄하시는 하나님, 호통 치시는 하나님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어려움의 벽을 깨고 우리가 하나님께 친밀함으로 나아갈 때 우리 신앙의 삶이 풍성해집니다. 조금 더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이들이 떨어져서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가까이하려고 합니다.
화평이신 그리스도
두 번째 선물은 하나 됨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친밀하게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모든 분열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화평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원수된 것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원수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의 본래 의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한 선민사상을 갖고 있으면서 이방인들을 매우 멸시했습니다. 소위 개 취급을 했습니다. 이 담을 예수님께서 허물어버리셨습니다. 그 사이에 더 이상 어떤 편견도 오만함도 없게 만드신 겁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보아도 이와 같은 담들이 참 많습니다. 이것들은 잘 허물어지지도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런 장벽들이 있습니다. 지연, 학연, 사회적인 지위, 여러 이해관계들로 높은 담들이 쌓여 있어 서로 가까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분열을 조장하는 담들을 헐어 내도록 예수님께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이런 담을 둘러치고 있다면, 그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장벽들이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과감하게 허물어 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을 헐어내시면서 그 담을 쌓게 만든 주범인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15절에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바울사도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폐하셨다고 단언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구별을 위해 주장하는 의식법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법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 초하루, 안식일 등에 관한 규정입니다. 이와 같은 규범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심각한 담을 쌓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폐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유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자기 의, 자기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것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의, 우리의 공로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누군가 부족하다고 해서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정죄할 이유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넘어져도, 시험에 들어도 다시금 진심어린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음 받을 수 있는 은혜의 길이 열려있는데 자책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반면에 율법은 정죄의 기능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를 나누어 놓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롬8장2절에서“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했습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에 옥죄임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율법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로 인해 유대인들처럼 다른 이들을 정죄하며 사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오직 은혜와 믿음 안에서 살고 있습니까? 그로 인해 사람들을 품고 사셨습니까?
한 새 사람을 지어
예수님은 서로를 품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구원의 자리, 새 창조의 자리로 불러주셨습니다. 15절b“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말씀하였습니다. 구원은 새로운 창조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전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시고, 다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새롭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편을 가르고, 쉽게 정죄하고, 하나 되지 못했던 과거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함을 입은 새 사람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느 곳이든 들어가면 그곳이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분열과 갈등이 아닌 하나 됨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화평함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교회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셨습니다.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동시에 사람들과 화평하도록 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원수 된 것, 곧 죄를 소멸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자리 잡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우리는 다른 이들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죄가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즉시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닫혔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평안을 전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 번째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평안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우리들의 삶은 공허와 혼돈과 어두움으로 일관된 삶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오셔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신 것은 바로 평안입니다. 17절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세상은 결코 우리들에게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평안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때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고, 우리가 여전히 생각을 주장하고 있으니 늘 불안하고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4장2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평안으로 살아가는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더 이상 근심과 두려움이 자리 잡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
과거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친밀함이 회복되고, 분열과 갈등에서 하나 됨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우리 안에 평안의 선물을 주시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이루시고자 한 마지막 목표는 예배의 회복입니다. 18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나아감이라는 헬라어 프로사고겐은 구약성경에서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우리를 다시금 하나님과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이루신 가장 높고 온전한 성취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가 완성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모든 것이 다시금 종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성도와의 교제, 마음의 평안함, 성령의 기름 부으심, 말씀의 공급, 정말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예배 안에 무궁무진합니다.
올 한해 여러분의 예배는 온전함으로 드려졌습니까? 온전함으로 드렸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 새로운 영적인 힘을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원활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가 소홀할 때 예배 가운데 누리게 하신 많은 것들을 우리는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신 예배에 집중하여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2014년 여러분의 예배가 거룩하게 회복되어 영적으로 풍성함을 누리고, 그 누림을 통해 얻는 하늘의 평안을 이 땅에 전하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은 요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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