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주일예배설교원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 에베소서2장1-3절

by 최수근 2013. 12. 15.

2013년12월15일 주일설교문

[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 에베소서2장1-3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인간세상은 왜 암울한가?

지난 주 남아공의 만델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백인권력에 의한 큰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에서의 흑백 간에 끊임없는 갈등의 종지부를 찍도록 헌신했고, 그 땅에 평화의 열매를 맺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특별한 인물들을 통해 자유롭고, 인도적이고, 평온한 사회가 한때 만들어 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를 보면 그와 같은 화합과 평화를 이루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은 불가능해보입니다. 그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신음하고 있습니다.

올 한해 우리 사회만 보더라도 갈등과 반목 가운데 지내왔습니다.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걸림돌로 인해 정말 한없이 반복되는 소모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심히 답답합니다. 어떻게 한발자국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지? 더욱이 사회 곳곳에서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싸우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우리들 개인의 생활도 보면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난해와 비교해 특별히 달라 진 게 있습니까? 다람쥐 쳇 바퀴 돌 듯 지난 연말과 똑같아 보입니다. 생활의 문제, 관계의 문제, 진로의 문제, 취업의 문제, 결혼의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습관의 문제, 신앙의 문제 등 다양한 골칫거리들이 우리를 여전히 심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좀 시원하게 박차고 나갔으면 좋겠는데 보다 더 업그레이드되어 성숙함을 보여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만한 능력도 생각도 부족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바깥세상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우리들 내면의 문제이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방법을 찾아가고,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수많은 해결책과 그에 대한 의견들을 내놓고 있지만 그 뿐입니다. 딱히 답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자신과 세상을 변혁시켜갈 만한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바라보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평가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모든 인간 자체가 일그러져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모든 질서를 왜곡시켜 버렸습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 벌어지는 세상일들을 보면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한때 사람들이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도 있었지만 그 바람은 인간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잔혹함으로 비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21-3절에서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이 땅에서 벌어져 온 모든 현상들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체와 그에 따른 열매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는

우리는 에베소서21-3절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진단을 명확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구속받지 못한 인간에 대해 세 가지 섬뜩한 진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죄로 인해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1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의 현재 상태에 대한 진술입니다. “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죄 가운데 죽어있던 존재였습니다.

허물과 죄가 도대체 어떤 파워를 갖고 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죽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걸까요? 허물이란 뜻에 헬라어 파랍토마는 곁으로 비켜나다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잘못된 발걸음으로 정해진 경계선을 넘어가거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또 죄란 뜻에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 과녁을 놓치거나, 표준에 미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단어의 의미들로 볼 때 하나님이 정한 기준을 넘어섰거나 그 길에서 어긋난 것이 허물이요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별선을 넘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인간의 욕망을 죄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소외되었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로마서623절에서 죄의 결과를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물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들, 여전히 죄와 허물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말은 문젯거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고백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 죄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죽기는커녕 여전히 생기발랄하게 우리 주변을 활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기도 잘 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너희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당신 미쳤어!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버럭 화를 내고 말 겁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몸도, 마음도 아닌 가장 중요한 영역인 영혼에서 생명이 없습니다. 에베소서418절에서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말씀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보니 당연히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눈멀었고, 거룩한 그의 음성에 귀가 먹었습니다. 이들은 시체처럼 하나님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죄에 대해선 신속하게 반응하고 죄를 먹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삶이 거칠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그토록 이 땅에 죄가 창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고, 죄에 대해선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 없는 삶은, 그 사람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깨어 있다고 해도, 세상을 아무리 잘 살아도, 하나님을 향해선 죽은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기 전에 우리가 처해 있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인간들 안에 이 땅을 개선시켜갈 만한 어떤 힘도, 더욱이 구원에 이를 만한 어떤 자격도,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을 갖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세상의 악한 세력을 따르게 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그 결과 과거 구원받기 이전, 우리들의 삶은 사탄의 속박가운데 있었습니다. 세상과 사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본래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따르도록 창조된 인간들이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하여 영적 죽음 가운데 빠져있을 때 자연스럽게 무엇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세상 풍조를 따랐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을 따랐습니다.

세상 풍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기준과 가치를 말합니다. 세상에 만연해 있는 물질 중심의 사고와 인본주의적인 사고,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기초한 기준과 가치들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의 삶은 새롭게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악한 세대와 이 세상의 가치 기준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경우들을 경험할 때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 시대와 이 세상의 사악한 가치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을 말합니다. 2절 하반 절에서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악과 오류, 폭력은 사탄에게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시 하는 세상 사람들 속에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한 사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사탄은 위협이 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4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러나 아직은 아닌실현된 종말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종말의 사이에서 영적으로 긴장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렇듯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영향력이 사람들의 삶을 주관하고 다스릴 때 그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불순종하고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따른 결과는 이 땅에서 도덕적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육체의 욕심을 따랐다고 했는데, 육체는 타락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연스러운 육체적인 욕구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식욕이 폭음이나 폭식으로, 수면욕이 나태함으로, 성욕이 육욕으로 바뀔 때에는 이 자연적 욕구들이 죄성을 지닌 욕구로 왜곡됩니다.

다른 하나는 육체의 욕심에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의 잘못된 욕구, 즉 지적교만, 잘못된 야심, 진리에 대한 부정, 악의 나 복수심으로 가득 찬 생각 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해 그 추한 머리를 들 때마다 거기에서 죄의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렇게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고 거기에 지배당함으로써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죄가 사람들의 전 인격을 지배했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까지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실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두운 세력과 그 세력에서 파생된 왜곡된 가치와 시각의 힘에 갇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정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519-21절에서는 이와 같은 육체의 일들과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 밖에 있는 인간들의 실존입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낙관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그로 인해 자기들이 죽음에 이른 심각한 병에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상적인 치유책만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이것에는 세상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닌 세상 밖에서오는 근본적인 치료책이 필요합니다.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고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인간을 보면 절망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단번에 살리셨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구속의 과정을 위해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인간들 속에 보내셨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사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속하셨고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적 죽음에 이르렀던 우리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그 어느 누구도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상황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그대로 우리를 방치해두신다면 우리의 끝은 영원한 단절, 영원한 죽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이미 우리를 예정하사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소식은 바로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신의 과거,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복음의 소식으로 전환됩니다. 구원의 사건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잘 인정하지 않으려한다는 점에서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 기적을 맛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복음의 소식을 접하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어둠의 자리를 기웃거리고, 그곳으로 향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의 모습을 우리가 끊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볼 때,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려고 하는 신앙의 결단 없이 처음 은혜로 구원 받은 단계, 내게 모든 기준을 맞추어주시던 초보신앙의 단계에서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우리가 어떤 믿음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지를 결단하고, 세례의 과정을 통해 자기를 내려놓고 그리스도로 살아가고자 하는 거룩함의 결단과 헌신과 희생이 실행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이 세상에선 누릴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소망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 말입니다.

바울은 과거 옛 사람의 모습을 과감히 벗어버릴 것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라.” 여기에서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자꾸 과거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의 자리로 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맙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내고 새로운 믿음의 전환을 이루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을 때 우리 삶에 새로운 소망이 싹트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곧 성탄절이 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난 우리들의 모든 허물을 벗어버릴 수 있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주님은 지치고 상한 우리를 거룩하신 임재가운데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지난 시간 힘들게 살아왔던 우리들의 버거운 죄의 짐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주께서 주시는 안식의 기쁨을 누리십시오.

더 이상 자신을 죄와 허물 가운데 방치한 채로 자신을 기만하면서 살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모든 죄로 인한 억압의 사슬을 끊어주시고 우리를 이미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로마서66-7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입니다. 날마다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라 거룩한 생명을 가진 자로서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있는 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부양자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리는 거룩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