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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진정성: 마 25장 31-46절

by 최수근 2024. 3. 17.

2024년 1월 28일 주일예배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진정성: 마 25장 31-46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요즘 총선 70여 일을 앞두고 당들이 인재 영입을 하면서 갤럭시 신화를 만든 사람, 자동차 사장 출신 등 전문경영인들을 영입하는 게 추세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각 당이 대단한 영입인 것처럼 홍보하는 듯한 뉴스를 접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지금 망가지고 있는 게 이런 전문경영인 출신들이 없어서 이렇게 된 걸까?’ ‘그렇다면 이런 인재를 영입하면 정말 우리나라가 달라지고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런 분들 지금 국회 안에도 많으시고, 정부 부서뿐만 아니라 정부산하 연구소에도 우수한 인력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국민은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실패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분명 이들이 놀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최선을 다하였을 겁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도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매번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너무도 먼 자기들끼리의 무지개만 좇다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끝에는 죄송하다라는 한마디 말만 남기고 쓸쓸히 퇴장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은 우리 사회를 점점 취약한 구조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문제들은 심각해지고 있는데 해결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정말 악당들 빼곤 대다수 사람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은 자기만을 위한 열심이거나 자기들끼리의 품앗이 정도로 그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절대로 보통 시민들이나 아웃사이더들에게 확장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열심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울림도 실은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모든 행위에서 나타나는 진정성으로 인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고 해도,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해도, 자기 영역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넘어서서 타자를 공감하고 작은 위로라도 건넬 수 있는 삶의 모습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 삶은 주님의 그 어떤 향기도 있지 않은, 예수님과 무관한 삶이 아닐까요?

오늘 말씀은 달란트 비유에 이어서 마지막 때의 결산에 대한 비유를 반복하고 계십니다. 그건 자신의 주어진 삶에 대한 성실함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것이 자기 인생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확장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런 삶의 과정을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결산하시는 것이죠.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었습니다. 마지막 때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는 분류되는 것입니다.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나는 어느 편에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이 두 그룹의 차이는 무엇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에 있습니다.

 

양과 염소로 사람들을 나누고서 임금, 바로 인자이신 예수님이 오른편에 있는 양의 무리들에게 말합니다.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양으로 분류된 이들을 복 받을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나라를 상속받게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좀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임금을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 닥치지 않는 한 어떻게 임금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히겠습니까? 그런데 임금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 자기를 이들이 돌보았다고 했습니다. 임금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마시게 하였고 영접하였고 옷을 입혔고 돌보았고, 옥바라지를 했다는 겁니다.

이 말에 놀란 것은 당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임금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왕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이에 왕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이들에게 합니다.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곧 임금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동일시는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입니다. 대다수 사람의 열심은 반쪽짜리 열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두 개의 돌판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이 같아야 한다는 거죠.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동일시에서 예수님에 대한 마음과 타자를 향한 마음 또한 진실함을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점에서 양의 무리에 속한 이들은 그들의 시선을 확장해서 다른 이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과 마음이 타자, 그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한 돌봄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의무적인 행함이 아닌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웃에 대한 동일시에서 오는 겁니다. “너는 그토록 고통을 받던 나구나.” 이런 긍휼의 마음은 밥으로 물로 옷으로 환대와 위로로 드러나는 것이고 그들은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을 보아도 모든 사람에게서 측은한 마음이 다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이것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왼편에 있던 염소의 부류들에게는 저주가 선포되었습니다.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 이유는 임금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옥에 갇혔을 때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양의 무리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은 임금의 소리에 황당했을 겁니다. 나름 주변을 돌아보면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삶을 부정하시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래서 임금에게 우리가 언제 그랬냐고 항변하였습니다.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질타를 받는 일은 매우 기분 상하는 일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많이 상해 임금에게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억울해하는 그들을 향해 임금이 대답하였습니다,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앞에서처럼 임금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지극히 작은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타자를 대할 때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곤 합니다. 뭔가 나에게 유익이 될 만한 이들에게는 정말 잘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웃에게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상관이 없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힘든 사람들을 봅니다. 물론 다른 이들처럼 참 힘들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객관화될 뿐이지 그의 힘든 마음으로 들어가 공감하고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던지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자기와 무관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배고픈 사람은 그저 배고픈 사람으로, 목마른 사람은 그저 목마른 사람으로, 나그네 된 사람은 그저 나그네 된 사람으로, 헐벗은 사람은 그저 헐벗은 사람으로, 병들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은 그저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는 겁니다. “왜 그를 보면서 나의 배고픔, 목마름, 나그네 됨, 헐벗음, 병듦, 옥살이를 생각해 내지 못했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삶이 이 사람에게 천벌까지 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호하게 이것이 천벌 받을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목적하고 계신 걸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인데 이 논리라면 결국 행하므로 구원받는다는 결론이 아닙니까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은혜가 아닌 행위 구원론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서 받습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공로가 아님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삶은 거듭난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의 증거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과 주님을 향한 사랑은 말 몇 마디로서 확인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러면 그럴싸하게 말 잘해서 구원받으려고 할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믿음으로 세워지는 삶의 진정성에서 그 모든 것이 확증됩니다. 그 진정성은 거짓된 고백과 외식적인 행동으로서가 아닌 삶으로 보여주는 주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어야 하는 것이죠.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기독교는 예수님이 자기와 동일시 하고 계시는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타자를 향한 삶의 향기가 사라진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그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이 삶은 우리가 진정 예수님에게 속해 있지 않음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단지 종교적인 삶을 사는 것일 뿐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은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예수님과 연합 삶을 결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누리지 않고 낮아지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기에 제자인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그렇게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기준점입니다.

배타와 배제에서 벗어나려면 외부와의 연결이나 연합은 필수적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이는 나와 너 사이로 확장되어 나아가야 합니다. 염소의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나그네 됨과 헐벗음과 병듦과 옥살이는 돌보았을지 모르지만, 그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선은 그들에게로 향해 계십니다.

진정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처럼 예수님을 본받아 그 사랑, 그 믿음의 진정성을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일이며,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책임입니다.

오늘 그 사랑을 다른 이를 향한 마음과 행동을 통해 우리 주님께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에서 복을 받을 자들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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