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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나는 아니지요: 마 26장 17-25절

by 최수근 2024. 3. 24.

2024년 2월 18일 주일예배

[나는 아니지요: 마 26장 17-25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많은 이들이 살아가면서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누군가에게 상처 입었을 때, 이 모든 것을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분명 이런 결과에 대해 스스로 자기를 비난할 거리를 수없이 찾아내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와 시간을 더 많이 가졌더라면 그가 날 배신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만약 내가 내 그 사람에게 더 관대하게 대했다면 그녀는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이런 자책은 오히려 상대방의 행동을 합리화해 줄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양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선택권과 의사소통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이유는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여 나를 속이고, 나의 것을 빼앗고, 나를 배신하기로 선택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물론 믿었던 이들의 배신은 큰 혼란을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인 사회 규범에 따라 행동할 거라고, 가족이 사랑하고 돌봐줄 거라고, 연인이 나만을 바라보고 나를 존중할 거라고, 직장 상사가 진실할 거라고, 사람들이 적절한 경계선 안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행동할 거라고, 내가 이러한 규범들을 잘 지킨다면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할 거라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무너지니 혼란스러울 수밖에요.

그러나 이 땅에 여전히 많은 다른 사람들은 그런 믿음과는 달리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그런 상호 간의 규칙을 쉽게 어깁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긴 겁니다. 그들의 배신은 나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인 그들의 결정과 행동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오랜 시간 계획된 결과인지, 혹은 충동적으로 기회를 잡아 일으킨 일인지 궁금해질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이 정말 내 친구, 연인, 가족이었던 적이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배신은 혼란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종교 지도자들, 우매한 군중은 그렇다고 쳐도 지난 3년간 예수님과 함께하였던 제자들의 배신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배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고, 오히려 위로 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아름다운 섬김과도 같은 모습이 한 줄기 빛처럼 암울함 가운데 비쳐오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예수를 넘겨주고자 하면서 그렇게 엄청난 배신에 대한 대가로 단지 은 삼십을 받아옵니다.

26:14 그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26:16 그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어찌 은 삼십에 예수님을 넘겨줄 생각을 했을까요? 은 삼십은 노예 한 명의 값어치에 불과한 매우 적은 액수입니다.

21: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이걸 보면 유다의 셈법에서 예수님은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유다가 예수를 그렇게 팔면 예수님이 각성할 것을 기대하면서 배신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런 그의 천박함과 한없이 가벼움 속에서 그렇게 속 깊은 생각을 가졌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예수님을 배신하는 얄팍한 자일뿐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회개조차도 못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어리석은 선택까지 했다고 봅니다. 그렇게 은 삼십을 받은 그날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최적의 기회를 찾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자들이 예수님을 향한 헌신을 낭비라고 하지를 않나, 심지어 예수를 팔아넘기는 대가로 은 삼십을 받지 않나,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속내를 다 아시고 그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실은 가늠이 가지 않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무게를 지탱하고 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 주님 때문에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배신의 향기가 점점 짙어지는 상황에서 유월절이 다가왔고,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26: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에 예수님께서 한 집을 찾아가도록 하면서 그 집 주인에게 전할 말 또한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주님의 말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26: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주님의 말씀을 제자들을 통해 전해 들은 주인은 허락을 하여 제자들이 유월절 준비를 하게 됩니다. 날이 저물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유월절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제자들은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26: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예수님을 누군가 팔아버릴 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도 다른 이들이 아닌 바로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버릴 거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모든 제자들에게 그 가능성이 다 열려있다는 것에 제자들은 무척 당황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문제입니다. 펄쩍 뛰며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12명이 반응이 좀 묘합니다.

26: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몹시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게 근심할 일입니까? 화가 나고 놀랄 일입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제자들이라면 이렇게 반응할 일은 결코 아닙니다. 이건 매우 소극적인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주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이 말은 주님, 나는 설마 아니겠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 확신 없습니다. 단지 주님이 너는 아니다라고 말해주기를 청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겁먹고 근심하여 주춤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6: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는데, 동시에 같은 한 그릇에 손을 넣는 것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식탁에 앉아 같이 먹고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게 하신 말은 아닙니다. 단지 이건 12명 모두를 향해 열려있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우리 자신을 지켜내지 못하면 배신의 가능성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배신의 결과는 참담한 것입니다. 배신으로 인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따라 십자가를 지실 것이지만, 배신한 이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심지어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생 자체가 끔찍한 생이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유다의 생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경고의 말을 들었으면 조금의 양심은 남아있어 움찔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가룟 유다는 천연덕스럽게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26: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성경은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처럼 나는 아니지요주님께 말함으로써 주님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 그에게 네가 말하였도다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얼핏 이 말을 제자들이 들으면 유다도 아니구나 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을 것 같습니다.

왜 제자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적극적으로 천명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베드로가 나중에 내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에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음에도 그런 비극은 일어났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자기의 안위를 위해 다 도망갔습니다. 결국 유월절 식사의 자리에서 설마 나는 아니겠지요라고 말끝을 흐렸던 모든 제자들은 하나 같이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 돌이켰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가롯 유다와 달랐습니다.

저는 2024년 사순절 첫째 주일을 보내면서 사순절 절기 동안 우리 안에 이렇게 배신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보고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배신의 쓴 뿌리를 온전히 제거하여 우리 주님 앞에 우리의 신뢰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나는 아니지요?”라고 말끝을 흐리는 자가 아니라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주님을 배신하고 떠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곧추세우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안위를 위해 쉽게 다른 이들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옛사람의 자리에서 건진 바 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이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배신을 밥 먹듯 자행했던 이기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매우 친밀했던 열두 제자에게 예수님에 대한 충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하물며 제자들과 같은 그런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종종 그런 상황 앞에서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적 위치를 지속해서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헌신과 배신을 구분하는 선은 백지 한 장 차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항상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작용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실패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불가피한 상황이었서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우리 스스로 내린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에 홀린 듯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의지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자들처럼 나는 설마 아니겠지요라고 쩔쩔매며 주님의 답변을 기다리는 자가 아닌 우리 자신이 분명히 그런 선택에 서 있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는 변함없는 믿음의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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