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4월7일 주일설교문
[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 빌4장10-20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아빠가 더는 못하겠다. 나도 이 나이쯤 되면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칸 갖고 있다가 니들 물려줄 줄 알았어. 근데 서울에 쌔고 쌘 것이 아파트인데 내 거 하나가 없다. 30년간 니들 키운 빵집 처분하고 남은 건 고작 500. 내 30년 세월의 대가가, 이 500이 전부다.” 이건 얼마 전에 종영된 『청담동 엘리스』라는 드라마 의 한 대사입니다. 이 짧은 대사 속에 사람들의 삶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뭔가 잘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열심히 살아보지만 사실 우리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기대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면 당황하게 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얼마를 소유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흔히 더 많거나 더 좋은 소유를 바라는 우리들의 욕망은 실제로 삶의 빈 공간을 채우려고 하는 갈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채우고 채워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면의 빈 곳을 느낄 때마다 무엇에 이끌리게 됩니까? 이 세상의 것으로 채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 길은 끝이 없이 우리를 허기지게 만든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해야 할 의무에 초점을 맞추고 산 사람입니다. 바울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원에 집중하려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내어버렸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1. 자족하기를 배웠다.
바울은 선교사역을 펼치면서 자비량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사역의 대가를 받는 것이 교회에게 부담이 될까봐 한사코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독자적인 선교가 시작된 시점부터 바울을 여러 차례 후원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얼마 동안 빌립보교회가 바울을 후원할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드디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감옥에 수감 중인 바울에게 헌금을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한 모든 권면을 마치고 나서 자기에게 보낸 헌금에 대하여 감사를 하는 것이 10절의 내용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바울은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후원금을 보낸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보여준 관심을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후원금을 보내주면서까지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저들의 관대함에 대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면서도 재정 원칙에 대하여 분명한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즘처럼 돈에 약해진 목회자나 성도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여기에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로서 바울은 교회들의 후원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일체 물질적인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중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데살로니가나 고린도 같은 부유한 항구도시들에 많은 스토아 또는 냉소주의 철학자들이 삶의 지혜 또는 성공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쳐준다고 강의하면서 모금행각을 하며 떠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도시들에 와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주장하면서 모금을 했다면, 그 또한 그 도시의 주민들에게는 스토아나 냉소주의 철학자들 중 하나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도 그들의 철학의 일종으로 사람들에게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울은 자신과 복음을 그들과 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철저히 차별화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 성도들의 물질적 도움을 사양하고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빌립보교회와 특별히 신뢰하는 관계로 그들이 보낸 후원금을 사양하지 않고 받았지만 바울은 자신에게 그 어떤 후원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신앙적인 중심을 잘 잡고가고 있음을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 자족하기를 배웠음을 11절에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요한 비밀 하나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족함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가 처한 환경에 상관없이 지금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든 그는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비천에 처해도 지나치게 염려하거나 낙망하거나 비굴해지지 않고,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되어도 자만하고 방심하여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고백을 들으면서 저는 잠언 30장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7-9절에서 아굴은 기도하기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면 우리는 당장에 실족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자족함을 배우지 못하면 있어도 문제가 발생하고 없어도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2. 능력의 원천은 예수님이시다.
바울은 다시 한 번 12절에서 “모든 일 곧 배부름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족함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긍정적인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서 배운 걸까요? 그래서 자기 안에 숨겨졌던 놀라운 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자족의 힘이 결코 바울 안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 자기 힘으로 ‘자족’을 이루려는 스토아 철학자들과는 달리 바울은 자신에게 힘주시는 분이 있음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13절“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와 같은 자족함의 비결을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의 비밀은 스토아 철학의 자기 충족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극대한 된 의지를 통해서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의 능력은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됨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하면 된다”는 식의 긍정적 사고의 표현으로 보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편이시기 때문에 천하무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여기에서 고백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유하고 힘이 있든지, 가난하고 힘이 없든지, 대단히 많은 군중 앞에서 기름부음을 받아 설교를 하든지, 불결한 감옥에 감금되어 있든지, 자신이 처한 환경이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 자신을 하나님께 던져 만족하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힘주시는 하나님에 힘입어 자족함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급변하는 어려운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힘입어 그 분 안에서 만족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함을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로 올려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자족의 비밀을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배웠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 있기 시작할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
이렇게 환경에 관계없이 아무리 만족한다 할지라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제공해 주었던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14절“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복음 전도에 신속하게 헌금으로 참여한 유일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관대함의 정신입니다. 참으로 기독교적인 정신이 그들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관대한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관계들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관대한 마음은 그리스도인들이 교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을 바울도 14절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필요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교제를 나누는 순간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 즉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주목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교제는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 우리 안에 성도로서의 교제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대함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17절“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바울도 그들의 관대함으로 이익을 채우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관대함은 이 땅에서 결코 누릴 수 없는 하늘의 것을 누리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12장3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디모데전서 6장18절에서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관대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18절 하반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향기로운 번제가 드려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19절“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바울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물로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향한 헌신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어렵고 힘들었지만, 더군다나 자비량 선교를 표명한 바울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바울의 어려움 속에서 그의 필요를 느꼈고, 여러 차례에 걸쳐 그에게 헌금을 했습니다. 이것은 정녕 이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들이 아닙니다. 저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어떻게 이와 같이 행동했겠습니까? 바울도 당연히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사역에 대해 수고한 것을 받아 누렸을 것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도 자신들의 처지를 걱정하기도 바쁜데 바울 걱정까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은근히 모른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유익과 복을 우리에게 중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게다가 그 분 자신이 모든 복의 근원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분 안에서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울이 자족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우리의 자족의 수단과 보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도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그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향기로움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아낌없이 내어드리는 삶이야말로 더욱 채워지는 은혜를 입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환경을 넘어서서 믿음을 지키고,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는 삶이 아니라, 그래서 날마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주신 복음의 사역을 통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가는지 자신의 감당해야 할 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리스도인다운 멋진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이것이야 말로 주 안에 굳게 서가는 삶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기쁨이요,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령한 하늘의 복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베풀어주신 복으로 인해 늘 감사하며, 찬송하며 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그 힘이 저희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로 인해 자족하며 살게 하시고, 다함 없는 이 땅에 것에 헛된 소망 두지 않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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