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4월21일 주일설교문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선택 : 창13장8-1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아브라함을 성경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선택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세기12장1절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서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갑작스럽게 바꾸신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말씀만을 의지하였습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신앙은 항상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조차도 자신의 신앙을 위해 순간순간 싸워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강하다고 자신해도 순간 방심하면 비참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기 좋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두 손 들고 나온 아브라함이었지만, 곧바로 직면한 어려움으로 인해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창세기 12장1절 이하에선 그렇게 멋지게 그려진 아브라함이 창세기12장10-20절에선 곧바로 염려와 불신앙의 사람으로 그려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메소포타미아의 행복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이 기근의 땅임을 보고, 기근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대변하는 애굽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걸 보면 불신앙의 유혹은 신앙을 위한 최선의 결단을 선택한 직후에 찾아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러했고,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육신의 정욕으로, 베드로는 이생의 자랑으로 각각 넘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10장12절에선 말씀합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지만 아브라함이 자신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내맡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방법을 찾기 위한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야기된 위기로부터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구해주셨고, 거기에 수많은 재산까지 얻어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파장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은 창세기 13장에서도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을 맞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똑같이 번성하였습니다. 두 집안의 번성이 계속되면서 이제는 보다 넓은 땅이 그들에게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땅은 이미 선점하고 있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 좁은 틈에서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존이라는 피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한 아브라함과 롯은 땅을 놓고 인척간에 공개적으로 싸움을 벌이지 않기 위해 서로 떨어져야만 했습니다. 두 사람에겐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매우 타산적인 모습을 보이던 창세기12장10-20절에서 보여주는 모습과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13장8-9절에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가나안 땅을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먼저 땅을 선택하지 않고, 그 우선권을 롯에게 양보했던 것입니다. 약속을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대단한 관용을 조카 롯에게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최선의 선택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데에 있었음을 애굽에서의 곤욕을 통해 학습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다른 현실들이 마주치게 되면 다양한 반응들이 가능하게 됩니다.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선 아브라함은 다분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선택을 하였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혜로움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원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바로와 그의 집안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하지만 13장의 아브라함은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내일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롯은 아브라함처럼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완벽하게 활용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아브라함을 따라나서기로 작정했기에 복을 받았고 부요함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런 그의 선택은 그를 축복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선택은 아브라함이 아무리 떠나라고 해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데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겐 가장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좁은 땅으로 인해 갈등하지 않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아브라함을 떠나서도 자신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 겸손함을 잃었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자신도 독립해서 더 큰 부를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롯에게 위기를 주는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축복의 통로인 아브라함을 떠나는 순간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주셨던 모든 것을 다 잃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이루어가는 힘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루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떠난 여러분을 상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15장5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능력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신만만한 롯은 비참하게 끝날 자신의 결말을 알 턱이 없기에 아브라함을 떠나 자기가 자리 잡을 땅을 눈을 들어 바라고 요단 들판을 선택했습니다. 이 때 롯이 선택한 기준은 10절의 말씀을 보면 그 땅의 넉넉한 물에 있었고, 그 땅의 풍성함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곳은 롯의 눈에 그 땅은 여호와의 동산, 에덴동산과 같았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실은 여호와의 동산과 애굽은 상반된 개념이지만 롯에게선 일치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게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선택할 때 기준이 됩니다. 이들에게 오직 하나님만 계시는 골짜기는 너무 위험하게 보입니다. 넉넉한 공급이 있고 평평하여 거하기에 용이한 땅, 그러면서도 여호와의 동산 같은 곳이 이들에겐 좋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롯은 풍요로움에 마음을 빼앗겨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그 즉시 그 땅으로 자신의 가솔과 가축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 생각 속에는 횡재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거기에서 떵떵거리며 잘 잘 수 있을 거라 여겼을 것입니다. 롯은 선택에 대한 우선권이 주어졌을 때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다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택한 소돔은 물질적으론 풍요로울지는 모르지만 신앙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을 치닫고 있었습니다. 13절에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평가를 롯이 전혀 몰랐을까요? 하지만 10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롯의 눈엔 그 땅이 매우 아름답게만 보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사실을 개의치 않았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의 선택에는 고려할 만한 영적인 기준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인간의 선택입니다. 다른 것이 선택의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수없이 후회하곤 하지만 그 때 뿐입니다. 쉽게 잊어버려서인지 몰라도 그와 같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때 또 다시 과거의 습관이 반복되어 가장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점점 더 꼬여 갈 것입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이렇게 롯이 안목의 정욕으로 바라보고 선택하여 그 땅을 향해 떠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곧 바로 찾아오셨습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찾아오신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받습니다. 14절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약속을 소유한 자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약속을 소유하지 못한 롯의 선택은 풍성한 땅, 소돔과 고모라, 당장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부분, 겉모습에 근거한 선택이었습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매우 이기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선택하도록 하시는 것은 보이는 것에 대한 선택이 아닌 약속을 바라보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선택이었습니다. 롯이 선택한 요단 동편을 제외한 하나님이 바라보도록 하신 땅들은 사실 쓸모없는 황무지처럼 보였습니다. 몇 년 전 성지순례를 가서 보았을 때도 결코 그 곳은 좋은 땅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심리가 그렀잖습니까? 값나가지 않는 쓸모없는 땅 수 만평보다는 알짜배기 명동 땅 몇 백 평이 탐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라 하셨고 그 땅을 후손들에게 주리라 약속하였습니다. 15절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그리고 그 땅에서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6절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이것을 믿음의 시각으로 바라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좋지도 않은 땅에서 수많은 자손들까지, 이거 어찌 보면 고생 고생하라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당장 아멘이라고 큰소리로 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17절에서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고 명령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메마른 땅을 두루 다녀 보라는 명령이 감사하게 들릴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좋은 땅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억울한 마음도 있었을 텐데,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그런 억울함과 걱정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의 다음 단계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사실에서 롯이 좋은 땅을 택해 간 것에 대해 배 아파 하지 않고, 마음에 씁쓸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감사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과 보이는 것으로 선택하고 행하는 자의 차이를 분명하게 봅니다.
아브라함은 첫 번째 상황에선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였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약속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신앙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판단하며 미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선택입니다. 그런 선택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마6장3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반면에 롯이 선택한 요단 들판은 현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곳이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곳은 결국 아무것도 누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롯의 선택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축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현재의 물질적인 유익 추구를 기준하여 미래를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미래를 선택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보면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눕기까지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선택의 기준은 분명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뿐 아니라 감성에 의해 움직이며, 일관된 선호가 아닌 상황적 선호를 가지고 선택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기업들이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광고를 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휩쓸리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탄도 우리의 선택을 이용해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에 빠트리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가 철저히 대비하지 못하면 쉽게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탄은 우리 안에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있음을 보는 순간 이것들이 작동하여 철저하게 선택하도록 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사람은 분명 속을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나무가 하와의 욕심을 일깨웠던 것처럼 요단의 비옥한 골짜기는 롯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 감각적인 매력으로 인해 다른 고려 사항은 모두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결국 보이는 것이 잘못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롯의 선택을 통해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로지 보이는 것의 화려함만으로 이끌려갔다는 점에서 롯은 결국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어리석은 탐욕에 대한 형벌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롯의 본보기를 통해 우리의 눈이 그렇게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부지중에 많은 악에 휩싸이지 않도록 반드시 경계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롯은 자신이 낙원에 거하다고 상상하며 갔겠지만 실제론 지옥 바닥에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약속을 받지 못한 자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선택은 어떠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는 사람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발버둥 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한 자에게 결국 머물기 때문입니다. 롯은 자기의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고, 스스로 그것을 덥석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는 땅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그 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소욕을 따라 롯이 선택한 땅은 잠시 그의 것이 되는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전부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을 좇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악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어떠한지를 알아채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잘못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롯은 그 이후 하는 선택마다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번번이 선택하곤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무디어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 선택에서도 실기하기 마련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믿음을 좇아 행했고, 롯에게 먼저 선택하도록 관대함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기적이지 않았고, 너그러웠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내려갔던 애굽에서의 사건을 통해 자기가 그 분의 소유가 되는 것은 자신의 계획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탐욕스럽게 자신이 지킴으로써 소유하는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공급하심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자기 소유에 대해 관대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 모든 것을 수백 번이나 버려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심내고 안달하며 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선택하고, 후회하곤 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 성숙한 그리스도인다운 선택을 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선택의 길은 그리 편해 보이지 않고 좋아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자신을 죽이는 선택이 아닌 살리는 선택, 사망이 아닌 생명으로 나아가는 선택은 오늘도 우리가 믿음 가운데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나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흔들림 없이 은혜 안에 굳건하게 서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은 우리를 후회함 없도록 만들 것입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선택을 행함으로써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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