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2월2일 주일설교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환경들(2):창2장15-25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거하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워주신 동산을 보살피고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보호할 책임도 주셨습니다. 15절“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인간의 삶이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은 동산을 위임하셨습니다. 통치권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거룩한 생명을 위한 환경들
그와 더불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부여받은 피조물로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환경을 하나님은 이루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환경을 회복하고, 그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특성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첫 번째 주신 환경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회복해주시고, 은혜의 충전으로 다시금 한 주간을 살아갈 수 있도록 거룩한 날을 제정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은혜 받고 살아가도록 하신 환경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은혜로 살도록 만드셨기에 우리는 거룩한 주님의 날을 다른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구별된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힘으로 한 주간 이 땅을 거룩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은혜로서의 안식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거룩한 생명으로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주신 환경은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셔서 인간을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피조물은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살아가도록 거룩한 성전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거룩한 성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섞여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거룩함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영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빈 집에 불가할 뿐입니다.
세 번째 환경은 은혜로 허락해주신 생명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급자이십니다. 공급자이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생명나무를 먹고 살 때 우리는 지속적으로 거룩한 성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 공급됨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하늘의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그치고 공급이 끊어지면 영적기아상태에 빠져 결국 거룩한 생명은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질서
네 번째 부여해주신 환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열매는 허락하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도록 명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17절“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이와 같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보도록 하시는 환경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이 땅에 대한 통치의 권한을 위임하셨습니다. 왕적인 통치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처음부터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허락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것들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셨지만,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일한 금지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처럼 금지시킬 거라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에덴동산 중앙에 두지 말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나무를 두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금하도록 하셨을까요?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선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구별선으로서 선악과를 두셨고,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통해 그 구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 없는 순종에 대한 기대를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 말도록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비록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 왕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과 맞먹을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도록 이 금지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선악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선과 악을 판단할만한 기준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선악을 판단하지 말고 오직 그 판단의 권한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이것을 월권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선악과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자 한다면 그 선을 넘어서겠다는 것이죠. 결국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맞서는 것이고, 피조물이기를 중단하는 중대한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우리는 살리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원리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살리는 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악을 알게 하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동참하려고 하면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곧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대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세워주고 살리는 일에 전념해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제사장의 대표는 대제사장인데, 대제사장은 입는 옷에 흉패가 있습니다. 가슴에 흉패가 있는데 여기에 열두 개의 보석이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열두지파의 모든 죄 짐을 짊어지고 들어갑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합니다. 저들이 죄인이지만 대제사장의 가슴에 저들을 보석으로 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제사장의 일입니다.
제사장은 선악을 따지는 자가 아닙니다. 악한 자일수록 의욕을 가지고 그 안에 하나님의 가능성이 일 퍼센트만 있어도 그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로 가서“하나님! 이 죄인을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 이 사람은 보석입니다. 보석을 어떻게 버리시겠습니까?” 라고 중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습니다. 출애굽기32장에서 금송아지 사건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내가 다 쓸어버리고 너와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는 가로막아서며 안 된다고 했어요. “하나님! 이 백성들이 어떤 백성들인데, 죽이면 됩니까? 안 됩니다.”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중보자의 마음, 제사장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가졌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어떤 사람을 보더라도 선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려야 되겠다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문제가 있는 사람일수록 제사장의 마인드를 가지고 내가 살려야 되겠다고 접근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이것을 월권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선악과의 질서인 것입니다. 선악과 질서, “살리는 일만 하겠습니다.” 절대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좋지 않은 말을 만들어서, 험담을 해서 퍼뜨리는 일을 않겠다는 것입니다. 심판 정죄 결론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일만해야 합니다. 이러면 나도 살고 함께 하는 모든 지체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환경이 아닌 서로 죽이려고 하고 정죄하고 단죄하고 판단하려고 하니 우리가 참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지옥의 환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환경으로 속히 바꾸어야 합니다.
돕는 배필의 질서
마지막 다섯 번째 환경은 서로 돕고 살아가도록 하신 돕는 배필의 환경입니다. 18절“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어주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또 다른 인간이 있을 때, 완전한 존재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돕는 자란 말은 그 의미가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 온전하게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복이 생육 번성 충만, 이 땅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남자 혼자 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에게는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돕는 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즉시 계획을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를 취하여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어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돕는 배필을 향한 아담은 황홀경 속에서 그의 완전한 반려자를 만난 것을 시로 표현하였습니다. 23절“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서로 돕고 사는 돕는 배필이 되도록 그 환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때에 그 삶과 목적이 완성을 향해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24절“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로써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게 만들어진 돕는 자로서 남자와 연합함으로 온전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창조의 근본목적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창조의 질서로서의 결혼입니다.
물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하나 됨은 사랑과 절대 신뢰에 기초한 것이어야 합니다. 25절에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에 대한 순전함과 사랑과 절대적인 신뢰의 정신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평가하셨듯이 사람은 남녀의 결혼을 넘어서 혼자 행하는 것 자체가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개별적인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성과 사회성을 가진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 돕는 배필의 질서를 따라 함께 거하는 환경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장2절“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곳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미워하기보다는 저 사람을 내게 왜 붙여주셨을까 생각하면서 그를 돕는 배필이 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어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삶이 아니라 순전함과 사랑과 절대적인 신뢰의 정신으로 품어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서로 믿음 안에서 교제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함께 사역을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부끄러움 없이 드러낼 수 있고, 더불어 사는 조화로운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 관계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이야말로 지옥 같은 삶을 천국과 같은 삶으로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환경의 변화를 선택하라
창세기 2장에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환경을 조성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환경을 살아갑시다.
안식일의 질서, 은혜 받고 살겠습니다.
성전의 질서, 거룩하게 살겠습니다.
생명나무의 질서, 말씀과 기도로 공급받고 살겠습니다.
선악과의 질서, 살리는 일만 하겠습니다.
돕는 배필의 질서, 돕는 배필로 살겠습니다.
환경의 변화와 성취는 스스로 무엇을 선택하기로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전에 살았던 삶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새로이 주신 거룩한 생명의 삶을 지켜내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곧 세상에 더럽혀진 환경에 오염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허락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환경이 오늘 우리 안에서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여전히 옛 사람의 환경에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생명을 지켜갈 수 있습니까? 오염된 그 현장에서 당장에 죽고 말 것입니다. 살아있지만 결코 거룩한 생명으로 살아있지 못한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나의 환경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 부여해주신 거룩한 생명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이화여대 석좌교수인 최재천교수는 “환경을 파괴하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우린 진정 ‘짧고 굵게 살다 간 종’으로 기록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했어요. 하나님 주신 환경을 파괴하거나 빼앗겨 버린다면 우리는 생육 번성 충만이 아니라, 이 땅을 다스리는 킹십의 축복이 아니라 그 거룩한 생명이 그치고 곧 죽게 될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것은 햄릿의 고뇌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거룩한 고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도록 초청하셨습니다. 반대로 사탄은 끊임없이 그 환경을 훼손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여러분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 마귀와 대적하여 여러분의 거룩한 환경을 온전히 짐키고 세워가기를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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