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9월28일 주일설교문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 마5장38-4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일본은 참 가까이 하기에 먼 나라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일본정치지도자들이나 극우세력들의 과거나 요즘의 행태를 보면 실은 상종하기도 싫은 나라입니다. 역사의식도 없어 보이고, 굉장히 속도 좁고, 이기적인 민족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나 일본은 집단적으로 대할 땐 대화가 잘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말이 통하질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보면 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좋은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이기적 집단 속에 파묻혀 그들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판국이다 보니 안타깝게도 요즘 들어 점점 더 두 나라 사이가 경색되고 있습니다. 이런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시점에서 지난 18일부터 22일까지 4박5일간의 일정으로 일본 요코하마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요코하마 교회는 일본선교에 열정을 갖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함께 모이고 있었습니다. 주일예배, 새벽기도, 금요기도, 주중 나라별 모임 등에 많은 젊은이들이 나와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런 열정덩어리인 청년들과 같이 요코하마의 길거리로 나가 전도를 하고, 요코하마교회에서 파송 받은 선교사가 개척한 후지사와 교회에서도 이틀간 그곳의 젊은이들과 함께 하며 전도하며 교제하였습니다. 전도하면서 엄청 걸었고, 엄청 거절도 받았습니다.
그렇게 4박5일의 일정을 소화하면서 그전에 일본에 여러 차례 오가면서 느끼지 못했던 복음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요코하마와 후지사와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 사역자들과 청년들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밖에서 볼 때 염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현장에 들어가서 볼 때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 속에 성령께서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일본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요코하마와 후지사와에 있는 한국인 선교사와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일본인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본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지만 소수의 무리들은 일본 땅을 향해 복음을 들고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지 않습니다. 저도 전도를 해보니까 일본인들이 얼마나 무시를 하던지 그냥 그 자리를 떠날까 하는 생각도 처음에 해보았습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에 수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그들을 품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우리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저는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일본인들을 위해 나도 이렇게 헌신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요나처럼 저 일본 땅이 빨리 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의 선교를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일본이 용서를 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저들을 심판 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 종종 그런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심판 발언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우상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본의 젊은이들과 한국의 젊은이들, 중국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저의 생각과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세 나라가 갈등관계에 있는 데 세 나라의 청년들은 복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전도하고, 같이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저들을 이렇게 하나로 만들어준 걸까요? 바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들이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 태도, 마음, 영적인 수준이 업그레이드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높은 영적인 수준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나은 의를 갖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기업을 받을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변화된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고, 손해 본 만큼 상대를 대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패러다임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늘 폭발직전입니다. 여기서 쾅, 저기서 쾅, 긴장이 흐릅니다. 주변에 모든 사람들을 적처럼 대하고 삽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책 “적을 만들다”에서 “우리는 타인을 적으로 만들고, 그 위에 산 자들의 지옥을 건설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타인을 적으로 만들다 보면 내 속엔 지옥이 싹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반목하며 지옥을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금 이곳에서 지옥을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티격태격하거나, 지배하려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자기 것을 주장하지 말고 오히려 사람들을 끝까지 품고 섬길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되로 받고 말로 갚는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통용되고 있는 보복법에 대한 적용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살다보면 다툴 수도 있고,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반대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그 어떤 기준도 없다보면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에 율법에서도 법을 제정 해놓았습니다. 출애굽기21:22-25“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했습니다. 이 법의 목적은 법정에서 가해자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정의를 세우고, 또한 희생자에게 정확히 똑같은 만큼만 배상하고 그 이상은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데 있습니다. 법을 통해 가해자건 피해자건 과도한 보복으로 인한 또 다른 피해가 없도록 배려한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정당한 징벌 원리를 법정으로부터 대인관계 영역으로 무한 확장시켜버렸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법을 사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개인적인 보복은 율법에서 금한 일이었습니다. 원수를 갚는 일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과거 율법을 통해서 주신 보복법이 개인적인 관계에서 적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38절“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9절“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사람들 속엔 자신이 해를 입은 만큼 갚아주고 싶은 마음, 그 이상으로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복수를 해야 통쾌한 겁니다. 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한일관계가 그렇습니다. 곧 아시안게임에서 일본과 축구경기를 8강전에서 하게 됩니다. 지면 난리가 날 겁니다. 저들을 이겨야 합니다. 스포츠를 통해서라도 복수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지금 집단 히스테리에 빠져 있습니다. 헌데 예수님은 그 속성을 뒤 엎어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친 이들을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똑 같은 보복이 아니라, 더 심한 반격이 아니라, 이것들 없이 상대방의 불의함을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악한 이들을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불의한 자들의 횡포 앞에서 그냥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말씀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악한 행동을 너그럽게 보아주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악한 자의 번영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허용하시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되갚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먼저 나가고, 입에서 거친 말들이 나가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로 인해 늘 악순환 되고 있습니다.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IS 이슬람국가의 행태를 보면 심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미국과 미국에 협조하고 있는 국가의 국민들을 참수하기까지 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지하철 테러까지 자행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나라들이 IS의 전략시설을 폭격하는 일에 동참하였습니다.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폭격에 죽을 것입니다. 무고한 피해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이런 악순환이 끊임없이 돌아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지금의 구조입니다. 행한 대로 되갚아 주겠다, 아니 그 이상으로 갚아주겠다는 것이 세상 정의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끝이 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부인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냥 죽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살려하니까 문제가 꼬이는 것입니다.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여기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어떤 것인지를 실제화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4개의 짧은 예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하며 살아야 하는 지,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어떻게 적용하며, 어느 정도까지 사람들을 품고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모욕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지금 뺨을 맞는 장면은 손등으로 오른쪽 뺨을 강하게 때리는 모욕적인 장면입니다. 전에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뺨을 맞아 본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지 모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없이 나약해지지 않는다면 그 순간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되받아 쳐주거나 상대의 멱살을 잡고 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순간 씩씩거리고 있는 상대방을 향해 왼편 뺨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열 받아 있는 상대방에게 왼쪽 뺨을 가만히 들이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오히려 상대방의 화를 돋워 한 대맞고 끝날 일이 한 대 더 맞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시는 걸까요? 불의한 세상을 향해, 불의한 개인을 향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감정, 우리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에게 심리적이나 물리적인 타격을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속인으로 살아가지 말고, 자기의 분노를 절제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나를 해코지 하는 자들을 아예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불의함에 검사가 되지 말고, 그들의 어리석음에 반응하지 말고 긍휼의 마음으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추상적으로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을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체포되어 끌려가셨을 때,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손으로 때렸습니다. 채찍질 했습니다. 가시관을 씌우고 조롱하였습니다.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예수님은 갖고 계셨습니다. 자연도 다스리는 분이신데 고작 사람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잔인한 조롱을 끝까지 계속하도록 허용하심으로 보복을 완전히 거부하는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을 보여주신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무조건 당해라. 함부로 대적하지 마라. 그런 걸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단지 되받아치고, 복수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만족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상대방과 사회가 가장 잘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반응을 결정하는 이타적인 사랑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 행동과 동일하거나 비슷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팔복에서 말씀하신 긍휼의 삶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의해 핍박받는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지 악한 자들에게 되갚아 주는 짜릿함과 통쾌함이 아니라 하늘의 상을 바라는 삶을 요청하셨습니다.
빼앗고자 하는 자 앞에 서있을 때
두 번째 예는 부당하게 우리의 소유를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는 아무도 개인의 겉옷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출22:26-27“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이처럼 겉옷은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겉옷보다는 자신이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속옷을 달라고 하는 상황이 아닌 가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이에게 속옷뿐만 아니라 겉옷까지도 벗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겉옷은 해가 진 이후에 덮고 잘 수 있는 이불의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건강과 생명과도 직결되는 것조차도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먼저 주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든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의 소유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목숨을 걸곤 합니다. 절대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제자들로서 자기 소유에 집착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오리를 넘어 십리를 걸으라
세 번째 예는 그 당시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상황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평민들을 징발하여 노역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단 오리, 약 천 걸음 정도만큼만 허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가실 때 로마 군병이 구레네 사람 시므온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 경우도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강제 노역으로 오리를 가야할 경우 기꺼이 십리까지라도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1절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군인들이 강요할 때 처음 오리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나의 선택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그 일에 대해 억울해하지 말고 기꺼이 감수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지금 강제 노역 같은 일은 없지만 아마도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바쁜데, 귀찮게 어떤 일을 도와달라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해야 될 일이 산더미 같고 실은 고민이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고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라 하셨습니다. 그들의 주문보다도 더 열심히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라는 겁니다. 시간과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화 된 것도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산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왠만해서는 사람들이 감동받지 못합니다. 남들이 하는 수준으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이신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상의 헌신적인 섬김과 자기 내어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삶이 될 때 감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돈에 인색하지 말라
네 번째 상황은 아주 민감한 것입니다. 돈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돈 문제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형제간에도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것 때문에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누군가 돈 얘기를 하면 슬쩍 뒤로 물러섭니까?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십니까? 이렇게 어려운 일을 말씀하시는 것은 돈의 문제는 늘 우리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추구하던 부자 청년도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낙심하며 돌아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와 소유에 집착하는 일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장애물이 됩니다. 그러기에 필요가 생기면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 관대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우리 자신의 권리보다는 다른 이의 권리를 기꺼이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다섯 번째 명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섬김 정신의 목표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해됨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선을 생각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필요로 하고 있는 선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 취급을 받을 때, 단순히 법적인 보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로 그들을 천국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삼아주셨고, 우리를 복의 통로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의로 무장하여 우리의 생각, 마음, 행동이 세상과 다를 때 처음에는 무시당할 수도 있고, 피해를 입을 수도 있지만 결국 세상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어 세상을 바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일을 몸소 실천하셨고,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제자로서 그 일을 행할 때입니다. 저는 일본에서 그와 같은 섬김을 통해 구원의 자리로 인도된 이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이웃과 우리의 학교와 우리의 회사와 우리나라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거룩한 촉매 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시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저들 속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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