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10월12일 주일설교문
[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마6장1-6.16-18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잘못하면 미궁에 빠질 수 있었던 범죄가 마침 그 현장을 지나던 버스의 CC-TV에 중요한 증거가 될 만한 장면이 찍힌 덕에 범인을 검거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눈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옆을 지나가며 은밀하게 촬영한 카메라의 렌즈는 피할 수 없었던 겁니다. 한 사람이 일과를 시작해서 마치기까지 다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하루에만도 수십 차례 CC-TV에 노출이 된다고 합니다. CC-TV는 물론 길가에 달려가고 있는 자동차의 블랙박스까지에도 내 동작 하나 하나가 기록된다는 일이 두렵지 않습니까? 이처럼 언제 어떻게 자기가 찍힐지 모르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거지를 조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은밀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길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보이는 것만 중요한 겁니다.
시편 가운데 저는 139편을 참 좋아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지혜로 사람의 전인격과 모든 행위를 완전하게 감찰하시고 아시는 분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숨을 수도 없고, 속내를 감출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종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가 많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종종 우리의 속내를 들킬 때가 있는데,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라면 그 눈길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목적과 동기를 감추고 갈 때가 참 많습니다. 금방 들통 날 텐데 미숙한 아이들처럼 행동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제자는 스승의 스피릿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녕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오늘 그 분의 스피릿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의가 우리의 행동과 말을 넘어 마음과 정신과 동기까지 배어져 들어와 우리의 삶의 근간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제자라고 하지만 뒤에서 제자가 아닌 삶을 산다면 그 간격으로 인해 결국 건강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제자라면 은밀하고 비밀한 곳, 남들에게 들어나지 않고 감추인 곳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의를 동일하게 이루어가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삶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있음을 알고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일 때 실행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종교적인 열심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그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했습니다. 그 점에서 이들의 의는 자기과시적인 의였습니다. 이들의 문제를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1절 말씀을 통해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예수님께서 보실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종교적 행위는 극장의 쇼나 연극처럼 연출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건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사람들 보는 앞에서 기도나 금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 앞에 보임으로 자기의 영광을 얻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동기가 문제입니다. 헌데 우리 안에 이와 같은 이생의 자랑에 대한 유혹이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의 경건함을 자랑하고픈 마음이 자리 잡고 있어요.
물론 우리의 공적인 경건생활은 영성의 발전에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예배를 위해서 모이고, 성경의 가르침을 받고, 경건으로 서로 격려함으로써 성장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로 진행된다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얻기 위해서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들의 종교 행위를 수행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저들을 보고 참 대단하다고 존경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들과 동일하게 공개석상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얻으려고 자신의 경건함을 과시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시고, 그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 말씀하시기 위해 그 당시 유대교의 공적인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세 가지 영역,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통해 앞으로 제자들이 행해야 할 경건의 방법을 새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과 우리 이웃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를 표현합니다. 구제는 이웃, 특히 궁핍한 사람들을 섬기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우리가 그분께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입니다. 이와 같은 공적인 신앙생활은 사람들의 영성을 발전시키고 그들의 경건함을 검증하는 영역이 됩니다. 여기에서 그 검증과 인정이 누구를 향한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과 구제
예수님께서 첫 번째 지적하신 영역은 구제입니다. 유대교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 있어서 구제는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자들은 가난한 이들의 곤경을 인식하여 그들을 돌보는 책임을 수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언제나 이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험에 드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자기의 내적인 부패를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제로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구제하는 일로 자신을 자랑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기에서의 문제는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는 손이 그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든가? 익명성을 유지하지만 조용히 우리 자신을 축하하든가? 아니면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기만을 열망하든가? 이번 주 토요일 아침신문에 안산재래시장에 모 교단에 속한 교회 1200여명의 교인이 몰려가 물건을 샀다는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물론 지역을 위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굳이 언론에 왜 알렸을까요? 조용히 진행된 일이라면 기자가 어떻게 알고 재래시장까지 찾아 갔겠습니까?
사람들의 칭찬에 대한 탐욕스러운 갈망은 바리새인들을 따라다니는 죄였습니다. 인간의 칭찬을 받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는 너무나 탐욕스러운 것이어서, 그들의 구제를 완전히 망쳐 버렸습니다. 우리도 완전히 똑같은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우리의 구제에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것인데 그렇게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러기에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종교적 의로서 구제하는 일에 사람의 눈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행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4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바리새인들 같은 과시적 태도로 구제하는 것을 금하시고, 이제 기독교적 방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은밀하게 주는 것입니다. 과시하고 떠벌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된 허영심을 억제하고, 죽이기 위해 우리의 구제를 다른 사람에게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비밀로 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흡족해 하기 위해, 또는 우리의 구제가 얼마나 관대하고 훈련되어 있고 성실한 것이었는지 우쭐대기 위해 계속 자신이 행한 일들을 되새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구제가 자축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겸손에 기초함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웃을 향한 삶은 계산하지 않는 관대한 삶이며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팔 불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는 교회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잃어버린 신뢰를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교회되게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 되게 하는 진정한 섬김이 회복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인과 기도생활
종교적 의에 대한 두 번째 예로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외식하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얼핏 들으면 별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기도도,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좋아하며 공적 기도가 그들에게 주는 자기 자랑의 기회를 좋아하였습니다. 더군다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보통 서서 기도했습니다. 또 회당에서뿐 아니라 길거리 어귀에서도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눈에 비추어진 그들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께 경건의 모습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 회당이나 거리에 기도하고 서 있을 때, 그들의 동기가 무엇인지 밝히셨습니다. 그들의 경건의 배후에는 교만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사람들의 칭찬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전부 다 받았느니라.”
오늘날에도 종교적 바리새주의는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다는 평판을 얻으려고 가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데 관심을 가지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무늬만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다 자기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교회를 뒤흔들고 나가버립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커다란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방해하고, 우리의 기도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문을 닫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차단하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골방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겸손한 경배와 사랑과 신뢰로 그 분 앞에 엎드려 절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리시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기도가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는 기도회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개인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의 공적인 기도모임에서 행해지는 합심기도도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서로 영적인 짐을 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밀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몰두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은밀한’ 기도를 강조하신 목적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할 때 우리의 동기를 정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공적인 기도이든 사적인 기도이든 간에, 하나님과 갖는 교제의 친밀함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친밀함이 없다면 그 기도는 일방적인 외침에 불과한 소리일뿐입니다.
그리스도인과 금식
세 번째의 예는 금식입니다. 성경에서 금식은 자기 부인의 훈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참회의 표시로 금식을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금식조차도 자기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는 동안 그들의 모습을 힘들어 보이게 하고 회개의 표시로서 머리와 얼굴에 재를 뿌림으로써 모습을 흉측하게 하였습니다. “나 지금 금식하고 있어!” 온 동네에 알렸습니다. 이것은 은근히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픈 교만으로부터 비롯되는 일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다른 종류의 접근을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과 금식하는 자간의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기에 반대편에 서서 제자들은 금식할 때에 금식의 티를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7절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왜 그래야 합니까? 금식의 목적은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자기부인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들의 종교적 훈련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저들이 야 참 훌륭하다 말 하리라고 기대하는 겁니까? 더군다나 삶이 변화되지 않는 데에서 드러나는 종교적인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습니다. 요즘 전도하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와 성도들이 종교적 의와 도덕적 의에 있어서 커다란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제자로서의 경건은 사람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보여 져야 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18절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렇게 바리새인들의 경건은 과시하는 경건으로 허영심이 동기이고 사람들에게 상을 받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은밀한 것으로 겸손이 동기이고 하나님께 상을 받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는 것, 구제하는 것, 금식하는 것 등 모두 그 자체로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구제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금식함으로 자신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선의 결과는 이것들을 각각 자기 과시로 바꾸어 버려 경건한 활동들의 진실성을 파괴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경건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바라보심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구제할 때, 은밀히 기도하고 금식할 때, 하나님은 은밀하게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우리들의 위선은 걷어버리고, 진실함을 보여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코람데오의 삶, 하나님 앞에서 서 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에만 우리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으로 대변되는 경건의 삶이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다른데 있습니다. 이것조차도 우리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갖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는데, 구제, 기도, 금식과 같은 공적인 신앙생활이 무너져버렸으니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보여줄 것이 없다는 데에 오늘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구원받은 이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의미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조금씩 우리의 경건한 생활이 나 자신의 위로도, 사람들의 시선도 아닌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리 잡도록 말입니다. 보상을 주된 동기로 여기는 것은 우리 자신을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비판하신 위선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가치 있는 동기는 하나님께 감사와 순종과 영광을 드리기 위한 노력으로 수직적으로 향해 있고, 또한 이웃을 위해서 수평적으로 향해 있을 때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고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이 일을 할 것인가?” “ 이 일이 사람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가?”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겉과 속 모두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그 둘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경건의 삶을 은밀히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오늘도 여러분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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