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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정욕의 통로를 제거하라: 마5장27-32절

by 최수근 2014. 9. 7.

2014년9월7일 주일설교문

[ 정욕의 통로를 제거하라 : 마5장27-32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얼마 전 제주지검장을 지내던 한 검사가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는 추태를 벌이다가 결국 검사옷을 벗기까지 했습니다. 잊을만하면 지도층 인사들의 이런 추태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이렇게 성적으로 도를 넘은 노골적인 모습들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탈을 꿈꾸는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은근히 즐길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 사는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끊임없이 유혹에 노출되곤 합니다. 육체의 정욕은 가장 낮은 비도덕적인 자리에서부터 영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어디든지 도사리고 있습니다. 로마교황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카톨릭 사제 848명이 성범죄에 연루되어 사제복을 벗었고 3200여명이 수도원 등에서 근신하도록 처벌을 받았습니다. 개신교도 만만치 않습니다. 육체의 정욕은 사람들에게서 틈만 생기면 그 즉시 넘어뜨리고자 유혹하는 사탄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세속문화를 접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다니엘이 바벨론이라는 타락한 사회 속에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거룩하게 지키고자 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고 거듭난 이후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을 가지고 집요하게 다가오는 사탄의 유혹에서 거룩한 성도로서 우리를 지키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을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까? 길거리를 나가도, TV를 틀어도, 인터넷을 보아도, 영화를 보아도, 사람들을 만나도, 책을 보아도 수많은 유혹꺼리들이 넘실거리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그 속에서 안 그런 척하면서, 도덕적인 척하고, 거룩한 척 하면서 은근히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관음증 환자들이 넘쳐나는 것 또한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겉으론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처럼 은밀하게 탐욕과 정욕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상 가운데서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어떻게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우리의 겉과 속을 어떻게 정직하게 보여드릴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성도로서의 청결함이 무엇을 옳게 행하느냐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청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성도로서의 청결함은 어떻게 마음을 옳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을 옳게 지키는 과정에서 심각한 갈등을 거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사도바울은 로마서722-24절에서 고백하기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였습니다.

우리 힘만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청결한 마음을 불어넣어주셔야 합니다.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우리가 철저하게 순종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체질이 변화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삶으로 나타나고,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금이 되고 빛이 되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의로 무장되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분명히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우리의 의가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위선적인 삶을 하나님은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치는 낮은 수준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21절부터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넘어서도록 하시기 위해 랍비들에 의해 그동안 덧칠되어온 율법을 하나님 나라의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의 작위적인 해석이야말로 인간의 교만이고, 자신의 욕심을 채워가기 위한 더러운 작업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종종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말씀은 우리에게 더 이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인 527-32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제7계명을 다시금 해석해주심으로써 끊임없는 정욕의 유혹으로부터 어떻게 우리를 지키며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어가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7계명의 재발견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제7계명을 두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돕는 배필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부부가 상호간에 언약을 잘 지킴으로써 올바른 관계를 이루어가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간음은 충실하고 진실한 부부의 관계, 책임을 다하는 사랑의 관계를 일순간에 깨뜨려 버립니다. 이렇게 간음이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제정하신 결혼제도를 허물어버리는 악한 행동이기에 금하신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이런 행위를 한 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음욕을 위해 하나님의 창조질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7계명에 대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계명의 범위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간음하는 행동자체를 하지 않았다면 마음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제칠 계명을 지켰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생각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외식하는 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내면이 어떻든 간에 겉으로 보여 지는 거룩한 행동에 치중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이들은 7계명도 단순히 육체적 간음행위의 차원으로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행위 자체를 범하지 않은 이상 이 계명이 그들과 상관이 없고, 이 계명에 관한 한 그들은 완전히 무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음란한 생각들에 대해선 면죄부를 주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중심, 곧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부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의 의미를 확대시켰습니다. 문자가 아닌 하나님 말씀의 스피릿에 초점을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했던 내면의 거룩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27-28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물론 이것이 이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를 금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단 음욕을 품고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불의한 상상가운데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출발을 행동으로부터 보신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에 음욕을 품은 순간부터라고 보신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한 행동들을 보면 대부분 마음의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먼저 출발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마음의 중요성은 잊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점점 더 위선적이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면과 외면이 불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외면의 거룩함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거절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이 하나님께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은 도덕적인 노력과 이상적인 목표를 향한 열성적인 수고와 계명들과 금령들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인간적인 힘을 다해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르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참담할 뿐입니다. 그 끝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의란 자기들만 의롭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의 도덕적인 정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명령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도 먼저 썩어 있는 우리들 내면의 환부를 도려내도록 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컨트롤하는 것들을 잘라내고 뽑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죄의 통로를 제거하는 가장 올바른 길입니다. 

죄의 원인자를 제거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죄의 길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탄 앞에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의로 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우리의 옛 사람을 거세 하는데서 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부인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선 그 어떤 것도 넘어설 수 없습니다. 29-30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범죄 하게 하는 오른손과 눈을 잘라내고 빼어내라는 엄격한 자기부인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29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어쩌면 참으로 혹독한 것인데, 이와 같은 방법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몸이 잘못된 성향에 의해 사용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성향이 우리 안에 들어오더라도 몸은 그대로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몸을 훈련하여 새로운 성향에 순종하는 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신체를 잘라낸 극단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3세기의 오리겐은 정욕을 이기기 위해 금욕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거세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실제적인 육체의 해함을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가지치기를 말합니다. 내게 있는 것들 중에서 우리의 영적인 삶의 진보 가운데 죄를 짓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것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잘라버리라는 것입니다. 매장시키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헛된 곳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힘을 쓰지 못하도록 끊어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엄격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애매모호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죄를 짓기보다 불구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불구자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사랑스러운 것이, 사람의 눈에는 사랑스럽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불구자인 삶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억제되지 않은 채 방치됨으로써 우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우리 삶의 죄 된 요소들을 관대하게 대하곤 합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유혹이나 습관, 혹은 활동, 관계 등을 과감하게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에 날마다 못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죄와 그로 인한 심판의 결과보다는 이와 같은 자기 부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영광스러운 새 몸을 갖기까지는 아무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우리에게서 죄를 끊어버리기를 원하십니다. 끊어내지 않으면 결국 죄로 인해 우리가 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8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깨어지는 결혼

그렇게 우리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죄로 나아가게 하는 것들은 단호하게 끊어내야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끊어내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부부의 관계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혼은 남자의 주도로 아주 쉽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신명기241절에 따르면 일정한 조건 하(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었을 때)에서 이혼을 할 경우 법적인 이혼을 위하여 이혼 증서를 줄 것을 말씀하셨지만 이것도 실은 이혼을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조건이 예수님 당시 시대에 와서 확대 해석되면서 이혼 증서를 주기만 하면 너도나도 이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음식을 태워도 이혼의 사유가 되어 이혼 증서를 주고 쫓아내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편리 한대로 악용한 사례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여자를 얻기 위한 탐욕을 채우기 위해 말씀을 악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행동들을 강력하게 막아섰습니다. 31-32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얼핏 들으면 특정한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오히려 다른 목적을 들어서 이혼 하는 것을 금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2010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상황에서는 아내를 버리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한번 맺은 혼인관계는 어떤 이유든지 깰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96절에 가서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 더욱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혼인서약은 인간관계의 모든 기쁨과 어려움들을 아울러 관통하는 사랑의 성실성을 상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이혼은 정말 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 쌍의 부부가 있다면 한 쌍이 이혼하는 상황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혼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혼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습니다. 부정, 무관심, 학대, 대화의 단절 등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결혼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파경에 이른 결혼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경우들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 이혼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는 관점에서 보아 최악을 피한 것 뿐 아니라 하나의 실제적인 조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깨는 일이야 말로 다분히 탐욕적인 경우들이 더욱 많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도 남자들이 다른 여자들을 얻기 위해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헤롯왕도 그 부류에 속합니다. 싫은 혹은 잘라내고 좋은 혹은 새롭게 붙이려고 하는 탐욕스러운 마음의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31-32절의 말씀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이혼증서를 오용하는 사람들, 즉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자 하는 자기들의 음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혼증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속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보다는 자기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기착각에 빠진 모습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얼마나 율법에 철저했고,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노력을 했습니까? 그 열심만큼은 누구도 따라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행위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하기 위해선 이와 같은 이들의 위선적인 삶을 끊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강력한 선포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이나 손이나 발이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세상의 탐욕적이고 음란하고 정욕적인 문화와 생활을 의도적으로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편협하고 무지하고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교제하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왕따를 당할 수 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마음의 청결함을 지키기 위해 세상적으로 불구자가 되기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기꺼이 그런 상실을 이기고, 사람들의 조롱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이 일이 시대에 뒤처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지체를 잃어버리고 불구인 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이끌고 지옥으로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세에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약간의 문화적 단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것인지? 세상 사람들을 따를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위선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세상 속에 은근히 묻혀 세상을 즐기며 살아간다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을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쫓아가다가 결국 하나님을 떠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매일 십자가에서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 가운데 서야 할 것입니다. 비록 세속문화의 패러다임으로 볼 땐 불구처럼 보이는 우리가 그 의로움의 자리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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