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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자신의 말에 책임지며 삽시다 : 마5장33-37절

by 최수근 2014. 9. 14.

2014년9월14일 주일설교문

[자신의 말에 책임지며 삽시다 : 마5장33-3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우리나라에서 약속을 가장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정치인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거철 마다 정치인들이 공약을 내거는 걸 보면 굉장합니다. “저를 뽑아만 주신다면 목숨 걸고 반드시 여러분에게 한 약속들을 다 이루어내겠습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많은 것들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비단 정치인들뿐만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언변만 좋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말하면서 서로 믿지 않습니다. 불신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더욱이 이윤을 중차대한 목표로 강조하는 오늘날의 기업문화, 진실을 존중하는 정보가 아니라 경쟁자의 평판을 손상시키는 데 효과적인 정보를 사용하는 오늘날의 정치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진실의 속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신사회 속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자신의 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말에 진실함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바라볼 때 안타까운 평가가운데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기독교인들은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게 좋은 소리는 아닙니다. 말만 많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보여주어야 할 신실한 삶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맹세를 지키라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도 같은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맹세나 서원을 남발했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신의를 과시하고자 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혹은 반대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해서 그와 같은 맹세를 남발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평상시 모든 일에 반드시 맹세를 해야 한다거나 서원을 해야 한다거나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맹세를 하고 지키지 않으면 그것이 죄라고 하셨지, 맹세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죄라고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23:22“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이것은 오늘날 쉽게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 앞에서 결심도 하지만 너무도 쉽게 그 약속을 저버리곤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여러 말씀을 통해서 맹세와 서원은 존중되어야 하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302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2321네 하나님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이 계명들을 보면 그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거짓된 맹세와 위증을 금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에서의 맹세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두려운 이름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습니다. 613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이것은 맹세하는 자의 영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지존자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각성시킴으로써 그 맹세에 신성함과 능력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맹세가 유대사회에서 의무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맹세를 하는 순간에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아니하면 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다면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도 안 되고, 그들의 약속을 조금이라도 깨뜨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바를 반드시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음에도 그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하신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207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그러기에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맹세하는 일을 엄격히 억제하고, 이것을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참으로 필요한 경우에만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맹세의 성경적 배경을 갖고 예수님께서 지금 유대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맹세와 서원에 대하여 잘못된 관습을 지적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어찌 보면 랍비들이 가르쳤던 33절의 말씀은 율법의 적절한 종합처럼 보입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말씀하시면서 등장한 네 번째 명제인 맹세에 대한 33절의 말씀에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데 그 말씀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쉽게 범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들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적용했습니다. 맹세에 관한 율법들을 단지 거짓맹세를 금하는 것으로만 제한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여러 말씀을 통해 맹세에 대한 신중함과 사람들이 내뱉은 말에 대한 신실한 실천을 요청하시는 것인데, 유대의 랍비들은 거짓 맹세만 아니라면 쉽게 맹세해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사소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까지 맹세를 남발하게끔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맹세가 크게 남용되면서 맹세가 진실을 드러내는 것에 기여하기 보다는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맹세에 대한 부담과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맹세에 대한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유대사회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큰 죄였습니다. 그로 인해 랍비들은 맹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들을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맹세와 그것을 지킬 필요성은 중요시 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이 맹세를 할 때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어떤 표현들을 허용할 수 있을 가에 골몰한 결과,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성전으로 맹세하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는다면 만에 하나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맹세의 책임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얼마나 유치한 수준입니까? 이런 일들은 종교의 타성에 젖다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실천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말씀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의 율법을 경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말이 사용되든 상관없이 약속은 하나님 앞에서 구속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맹세와 서원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율법을 연구한다는 자들이 이런 엉뚱한 행동을 하고 말았고, 바리새인들에 의해 이것이 계승 발전되면서 일반유대사회까지 흘러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피조물로 맹세하는 것에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죄의식 없이 일상 대화에서 맹세를 남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맹세가 지녀야 할 경외심이 그런 남발로 인해 제거되고 말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맹세가 남발된 결과 오늘날 말만 많은 정치인들처럼 서로 간에 신뢰할 수 없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와 같은 사회는 불신사회로 전락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한 삶을 보여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통렬하게 비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맹세하지 말라 

예수님은 이 일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셨습니다. 맹세에서 도망갈 구멍을 찾는 이런 경향 자체가 악하고, 참으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와 같은 잘못된 맹세의 관습에 대하여 무엇이 중요한 지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34a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맹세를 전면 금지시키는 것이라고 오해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오히려 제자들로 하여금 유대 사회에서 잘못된 맹세의 관습에 따라 맹세를 함부로 남발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그들의 잘못된 맹세의 관습을 멈추라는 의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주신 의도는 맹세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말에 진실함, 신실함에 있는데 유대 사회는 그 형식에 매어 달렸습니다. 이것은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이들의 속성입니다 

34b-37절까지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관습이 왜 잘못된 것인지,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의 맹세의 신실함을 보이기 위해 때로는 하늘을, 때로는 땅을, 때로는 예루살렘을, 때로는 자신의 머리를 걸고 맹세를 하지만, 이것들 모두는 실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맹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얄팍한 생각에서 피조물을 두고 맹세했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인해 예수님은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자신의 머리 즉 자신의 생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이 맹세에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표현과 언급하지 않은 표현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완전히 인위적이라고 보신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애써도 땅, 하늘, 예루살렘, 자신의 생명 등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고, 세상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가리 울 수 없기에 어떻게든 하나님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서원을 한 사람은 그 어떤 인증 표현을 사용했든 거기 수반되는 표현에 상관없이 서원한 바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고자 하는 순간 거짓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유대 사람들의 태도가 얼마나 경솔하고 본질적으로 죄악된 것인가를 지적하시면 그와 같은 헛된 맹세를 금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맹세의 출발점이 자기 의를 드러내는 데 있다 보면 더욱 과장되고 결국 그 맹세가 거짓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높습니다. 신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맹세를 남발하는 이들을 보면 대게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죄악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912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예수님이 강력하게 남용되고 있는 맹세를 멈추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이렇게 잘못된 관습에 젖어 있던 제자들을 향해 맹세하지 말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더 이상 말장난하지 말고 진실 되게 말할 것을 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야고보서512절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37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의 이중성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실은 할 수 없는데도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토를 달면서 자기가 마치 할 수 있는 것처럼 장황하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런 순간이 실은 너무도 많습니다. 이 유혹에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결국 거짓된 자로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람들에게 이런 장황한 말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나 자주 거짓말쟁이가 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들은 화려하고 많은 데 실제 행동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지금 한국사회가 불신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반면에 천국 시민들로서 우리의 말은 어떠해야 합니까? 세상이 우리들의 말에 신뢰를 하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면 우리의 말이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맹세 없이도 자신의 진실함을 보여줄 수 있는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진실을 실추시킬 수 있는 잘못된 맹세가 일반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의와 위선적인 삶에 빠져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하기 위해 조치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말에 절제와 말에 신뢰를 얻는 것은 참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진실합니까? 

사람들은 짧고 단순한 말로는 신뢰를 받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엄숙하거나 화려하고 대단한 표현을 맹세에 덧붙여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믿게 만들려고 애를 쓰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일상의 대화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헌터라는 이는 그와 같은 사람들의 속성을 보면서 맹세는 사람들이 거짓말쟁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경우가 너무 많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형태의 과장법, 최상급의 사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환상적인, 굉장한, 혹은 환상적으로 굉장한 아니면 다른 신조어들로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그런 표현들에 의지하면 할수록 우리는 인간의 언어와 약속들을 더 평가절하 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오늘 무슨 말을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믿게 만들 수 있을 가에 신경 쓰지 말고 어떤 단순한 말 한마디라도 그 속에 진솔함이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말이 짧고 단순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말에 신실함을 지금까지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남발하는 대신에 단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라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군더더기 말, 특히 강조하는표현들은 말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에서 지나치는 것은 대부분 과장되거나 거짓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말이 믿을 만하고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심으로 말해야 하고 자신의 말이 진정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꾸밈없는 말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짧은 말로 충분히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데 왜 뭔가를 더해서 쓸데없는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기들의 하는 말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신뢰를 쌓고 헌신적인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해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혀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 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맹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맹세 자체가 아니라 성실함이 주된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맹세는 결코 개인적인 성실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쟁이의 맹세는 무익한 약속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성실한 사람이 아니요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단순한 말은 신뢰받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성실함을 우리의 규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말 한 마디가 맹세보다 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예나 아니요 라고 말해도 충분히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말이라도 사인한 문서나 계약서처럼 신뢰할 만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땅에는 말을 너무도 쉽게 바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모릅니다 

진실이란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실제가 정확하게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겉은 진실한 자세로 진실한 내용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마음속에 거짓을 품는 것 또한 가능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벗어나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언제나 신실함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배울 때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진실 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삶의 표준이 이것보다 훨씬 낮아서 흔히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무가치한 말을 함으로써 신뢰를 잃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말만 많다는 평가가 이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누군가에 말을 할 때마다 혹은 맹세를 할 때마다 우리는 그 순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더욱 진실 되고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약속을 지켜야 하고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믿지 못하면 결국 아무리 소리 높여도 외면당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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