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10월5일 주일설교문
[원수를 사랑하라 : 마태복음5장43-4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신앙의 키워드는 구별됨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세상과의 구별됨이 없으면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세상과 적당하게 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다리를 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좇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옆집에 놀러가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영역에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옛 자아가 죽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기부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옛사람으로 살아가고,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주시는 영적인 유익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를 좇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마음속엔 빡빡하게 신앙생활하기보다는 좀 쉽게 가고 싶은 유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위 FM대로 하는 사람들을 좀 못마땅해 합니다. 적당한 선에서 신앙생활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타협하면서 가다보니 경계선 신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옛날과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엄청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자기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적용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네 원수를 미워하라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지적하시는 바리새인들의 문제점도 그들 나름대로 율법에 대한 열심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자기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적용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의 두 기둥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면서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레위기19장18절에서 하나님은“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웃은 어디까지입니까? 대부분 이웃의 범위가 좁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의 범위는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그런 이웃의 개념이 너무 불쾌했습니다. 이방인은 그들의 이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이웃의 범위를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동일한 국적과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고 해석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이웃은 오직 유대인들뿐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개 취급을 하고, 율법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을 정죄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에“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회피조항을 첨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명령은 구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정신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습니다. 랍비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을 향한 미움에 대한 구약 본문 중 일부를 작위적으로 해석한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원수를 미워하라”고 추가한 부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길이라고 반박하시면서 본래 하나님이 의도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우리 이웃에는 원수까지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의 흐름을 보면 세상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로 인해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것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실제 우리 삶으로 들어와서 보면 좋은 사람이야 문제가 없지만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이들을 품고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일입니다. 생각만 해도 부아가 치미는데 어찌 용서할 수 있고, 어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솔직히 죽이고 싶도록 미운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지옥이 아닌 천국을 살려고 하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이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사랑은 생각이 아닙니다. 사랑은 바로 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생각을 품고 있어도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이 되지 못하고, 우리의 거룩한 습관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이기적인 죄를 벗어나 말씀의 본래 의도대로 행하며 살아야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이고 싶을 정도로 속에서 열불이 올라오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고, 심지어 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본래 명하신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실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친구가 되었건 적이 되었건,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더 큰 의’로 뽑으시는 마지막 예는 우리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5장 전체에 걸쳐 암시되었던 것을 명백히 하는 것으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을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했고, 또 10절에서도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자격을 결코 전제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이해하기에 자신도 그와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호불호가 분명합니다. 자신에게 잘 해주는 이들은 좋아하고, 교제하지만 마음을 상하게 한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미운 마음이 앞서 버리는데 어찌 사랑할 수 있고, 어찌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울화가 치미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은 당파성, 편파주의, 족벌주의, 인종주의, 국가주의의 배타적인 이기심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와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심지어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도 파당을 짓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그 결과로 배타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상황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는 옹졸해집니다. 따라서 적대자를 효과적으로 다를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시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함부로 대하게 되고, 결국 반복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 한계를 분명 넘어서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우리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책임을 “절제의 절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분노를 참고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나를 핍박하는 원수를 향한 중보는 기독교적 사랑의 절정입니다. 본회퍼는 “이것이 최고의 명령이다. 기도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원수들에게 가고, 그의 편이 되며, 그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 점에서 기도는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속에 원수에 대한 사랑을 약간이라도 느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위해 기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들기 전에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이 싹트고 꽃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 기분, 생각을 기준 삼으면 어떻게 우리가 미워하고, 싫어하고, 증오하는 원수 같은 자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어요? 점점 미움, 증오가 깊어질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어떠한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양으로 내어주심으로 불의한 우리를 정결하게 하셨고, 우리를 양자삼아 하나님의 나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 어떤 차별도 행하지 않으시고 악인이든 선인이든 골고루 은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직 원수 되어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과 악인에게 평등하게 나타나는 무차별적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아들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이후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아들 됨의 특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와 같은 사랑을 이웃들에게 실행함으로써 확증됩니다. 예수님은 45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차별 없는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분명 구별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더 나은 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물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 유대인끼리만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정작 필요로 하는 이방인을 돌아보지 않고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로 세우셨지만, 그들은 그들의 이웃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극단적 이기주의와 극단적 선민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거룩함이 분리와 배척을 뜻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룩함이 긍휼과 자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웃을 향해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붙여주신 이들은 돌아보지 않고 끼리끼리 어울리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들 마음에 드는 자들끼리만 모여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하나님의 인정도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삶을 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보다는 더 나은 의를 하나님께 보여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들 하는 수준, 그것이 제자의 수준이 되어서는 곤란하시다는 겁니다. 46-47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비슷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선행을 능가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는 이웃 사랑의 공동체에 다른 이들을 포용함으로써 배타적인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그저 어떤 행동이 올바른지를 가르쳐 주는 본문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사랑을 보여 주시고 죽으신 예수님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리고 나아가서 그 사랑을 참으로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 세상에 우리가 직접 그 사랑을 나타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아가페 사랑이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 발견된 존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을 구별해주는 강력한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온전하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미 레위기를 통해서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그리스도인의 기준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우리 기준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준을 인간에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의를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들보다 조금 나은 것 같다고 해서 잘난체 하지 마십시오,
오늘 원수를 향한 사랑이라는 기준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기준점입니다. 그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신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세상과 구별시켜주는 힘이 바로 아가페 사랑에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세상 가운데 온전한 제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8절에서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원수들과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향해 보여주어야 하는 사랑의 모범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사랑하심에서 항상 온전하게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동, 생각, 의지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설정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목표를 이루게 하시는 거룩한 동력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의 도움을 찾을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여기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해를 입히려고 하는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행동을 단순히 용서해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용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저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서 온전하게 살아가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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