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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마음의 눈을 밝히사: 에베소서 1장 18-19절

by 최수근 2020. 9. 10.

2020년 9월 6일 주일설교동영상

[마음의 눈을 밝히사: 에베소서 1장 18-1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WTO가 코로나 펜데믹을 선언한 지 6개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그 기세가 꺽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각국의 봉쇄정책이 계속되면서 많은 이들의 생활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피로감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 틈에 세계 도처에서 음모론이 싹트고 있습니다. 

코로나 음모론입니다. 큐어넌을 중심으로 음모론이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바이러스 음모론을 퍼트리는 집단이 있습니다. 코로나는 가짜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언론이 조작한다고 이야기하죠. 어설픈 이야기 같은데 사람들은 솔깃해합니다. 그러다 어느새 음모론 신봉자가 되고 말죠. 그러면 다른 이야기는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 거짓이 진실처럼 둔갑하고 마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음모론에 왜 빠지게 되는 걸까요? 사람들의 문제는 상황을 바르게 읽어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자기가 선호하는 것만을 들으려고 합니다. 시야가 좁아지다보니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을 음모론의 시각만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겁니다. 음모론이라는 색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실은 음모론에 빠지지 않은 이들도 이런 성향들을 대부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식의 해석을 하는 거죠. 자기가 선호하는 것에 몰입하곤 합니다. 자기 고집이 있습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듣고 생각하고 나누고 다 필요없습니다. 대게는 자기 주장하기에 바쁩니다. 이런 형태가 기독교 신앙으로도 이어집니다. 

기독교는 내가 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듣는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듣지 않고 말하려고 합니다. 우상은 만들어지는 것인데, 하나님을 우상처럼 자기 맞춤식으로 맞추어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성령 받지 못한 이들의 모습입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하여 그 마음의 허망한 것을 행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연적인 의미에서 이지와 총명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비극적인 것은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그의 기능들을 바르게 행사하고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한, 이 죄악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성령의 밝혀 주시는 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성령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인식하지 않는 한 말씀은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알아야 하는 세 가지 위대한 진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복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신앙생활은 아는 것만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시선을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자연인의 모습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마음의 눈이란 바로 내적인 눈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으려면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야 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빛이 비칠 때 밝히 볼 수 있는 겁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 달라는 기도는 일회성 기도가 아닙니다. 매일의 기도여야 합니다. 그래야 고착화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될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로워야 감격이고 감사인 것이죠. 무디어지는 순간 우리는 은혜를 잊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히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무 목적 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결과 우리가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풍성하고 다양한 기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28:20b“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그리스도의 평강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기 위해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3:15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무엇보다도 우리를 부르심에서 끝까지 가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구원이 완성되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것에 대한 바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심의 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신하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은 한없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류에 따라 흔들리는 거죠. 

둘째,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두 번째로 드리는 기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18b)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시작을 가리킨다면 하나님의 기업은 그 삶의 끝, 성령이 보증이 되시고(14) 베드로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한 그 최종적 기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상속자 사실상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며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기업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늘에 있는 기업에 대해 생각하거나 심지어 기쁨과 감사로 그것을 기대하는 것을 주제 넘은 일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는 우리가 그것을 알게 그것의 영광실로 그것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내세를 잃고 현실 생활에만 집착할 때 이 세상은 산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혼돈, 무법과 부도덕과 악의가 판을 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끝을 보지 못하기에 똑같이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임을 알아야 합니다.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자랑스럽고 소중한 것입니다. 영적인 자존감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죠. 끊임없이 이겨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하나님의 부요함을 잃어버리고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고, 교회가 세상을 염려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 때문에 염려하게 되는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처음을 회고하고 하나님의 기업이 끝을 내다보는 것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능력은 그 사이 기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분의 부르심에 수반되는 기대를 채워 줄 수 있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실 최종적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에 이르도록 안전하게 데려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체험하지 못할 때 어느 순간 신뢰의 끈을 놓치고 마는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왜 나를 부르셨는지,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것을 이루어가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확신할 때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인 됨에 감사할 수 있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령한 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는 만큼 축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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