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설교동영상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가? 엡 1장 15-16절

by 최수근 2020. 8. 24.

2020년 8월 23일 주일예배 설교동영상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가? 엡 1장 15-16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코로나 시대에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뉴노멀입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새로운 기준이나 표준이 보편화되는 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보통 새 기준” “새 일상이라고 하죠. 코로나 19로 야기된 뉴노멀 시대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접근 방법이 필요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야만 뉴노멀 시대에 생존할 수 있으리라 전망합니다. 

뉴노멀 시대에 직면해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뜩이나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곱지 않았는데, 일부 교회 및 기독교 단체들이 시대와는 동떨어진 상황인식과 행동에 머물러 있어 전체 한국교회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따가운 시선이 불편하지만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뿌려놓은 씨앗이기에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시기적으로도 지금의 상황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가뜩이나 잃어가고 있던 교회의 영향력은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너무도 개인적인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 회복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작금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랑제일교회 일로 한국교회에는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조용하게 본분을 지켜가고 있는 다수를 보기보다는 목소리 큰 소수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앞에 서서 하나님 말씀이 아닌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욕망의 표출일 뿐입니다. 단순히 주일예배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은사가 있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실만 가지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당신 앞에선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자녀라 하지 않았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지 못했던 거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때는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하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원수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이런 일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과는 동떨어진 일들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건 예수님 때문에 순교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순교라는 말 꺼내는 것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행태입니다. 자기들의 목적과 유익을 지켜내고자 하는 희생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동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모호하지 않습니다.

1: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말과 다른 하나는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바울로 하여금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확신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누구에 대한 믿음인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너희 중에 있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신념도 이념도 아닙니다. 물론 사람에 대한 믿음도 아닙니다. 종종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을 믿음과 결부시켜버립니다. 이것이 절대적 맹신으로 발전하여 고집스러운 존재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신뢰함으로 자신의 삶과 사고방식의 중심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입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 되시며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출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사람을 맹신하고 있는 건지 진정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전폭적으로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십니다.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을 벗어나 사람, 신념, 이데올로기가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에베소 교회의 주 예수 안에서 믿음을 들었고, 그와 같은 믿음의 결과 그들에게 있는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언급합니다.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 풍성했던 겁니다. 소문이 날 정도로 말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어떤 특수한 사회적인 영역에 속한 사람들만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을 보는 새로운 시금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가 어떤 학교 출신인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내 형제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는 코로나 19 이전도 그랬지만 분열과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분명히 해야 하겠지만 사랑이 필요한 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뭐라 하고 있습니까?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어떤 비상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참된 믿음의 증표는 그 믿음이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불리워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지적인 신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면, 우리는 그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시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아 가면서도 사랑의 힘의 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3세기경 전염병이 창궐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들을 돌볼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북아프리카의 교부였던 키프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저들의 소명에 신실해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우리가 단지 우리(그리스도인)들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세리나 이교도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풀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며,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내리셔서 씨앗들을 기르시고 이러한 모든 선하심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만일 누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본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키프리안은 전염병이 돌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 마 543-48절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하라고 소리 높였습니다. 그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 속에 이교도들과는 다르게 행하라고 가르쳤던 겁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료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이교도들에게도 지극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자신이 감영될 수도 있는 죽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까지 실천한 형제 사랑으로 인해 이들에게는 영예로운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파라볼라노이입니다. “위험을 무릅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3세기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파라볼라노이라고 불렸다는 것은 기독교가 재난 속에서도 자기 희생적 사랑을 실천했다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감염될 위험 앞에서도 병든 이를 돌보았던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했고, 이 위기상황을 통과하면서 이교도들은 기꺼이 신자가 되기를 자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참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현재 방역 2단계로 2주간 온라인예배를 교회가 드립니다. 이것을 불편해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만을 이야기할 때가 아닙니다. 어느 일간지 만화 만평에 복음전파되신 코로나를 전파한 교회를 풍자하는 만화가 올라왔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마음이 너무도 아팠습니다. 

며칠전 수도권 한 교회에서 교인 3분의 1이 감염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교회 관계자가 하는 말이 방역지침을 잘 따랐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인터뷰를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공동체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소수의 방심이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나에 대한 애정만큼 다른 지체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면 세심한 행동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다양한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뚫리면 지역에 많은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세상과 척지기보다는 세상의 걱정과 염려를 덜어주는 선한 이웃으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를 향한 교회의 배려와 섬김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교회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시작된 뉴노멀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을 회복함으로 초대교회에 세상에 믿음과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 역사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하늘의 신령한 복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본 우리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젠 우리의 믿음을 공고히 하고, 교회공동체를 향한 사랑의 마음과 나아가 우리 이웃을 향한 사랑과 긍휼, 희생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시대에도 복음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이웃을 향한 사랑의 진정성을 품고 간다면 세상은 다시금 교회의 올바른 소문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