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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 엡 2장 1-3절

by 최수근 2020. 9. 20.

2020년 9월 20일 주일예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 엡 2장 1-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요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잘 알아서 관리하거나 의롭고, 자유롭고, 인도적이고, 평온한 사회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는 듯 보입니다. 환각 상태에서 폭주하는 포르쉐 운전자에게서, 그림 한 장 때문에 편의점에 차를 몰고 들어가 박살을 내던 여자에게서, 마스크 때문에 지하철 안에서 싸움판 벌인 아저씨에게서, 정치가 사라진 정치판 국회의원들에게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 사고 속에서 마음이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암울한 사회에 비추어 볼 때, 에베소서 21-10절은 매우 적절한 판단과 문제 해결의 길이 제시되고 있어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전반부에서 바울은 사람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낙관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절망과 믿음의 결합으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 어떻게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생생한 비교로 그것을 그려갑니다. 

오늘은 전반부 1-3절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퇴폐적인 어떤 집단이나 사회의 타락한 부분, 혹은 심지어 당시에 극도로 타락했던 이교도들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성경적인 진단입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사람, 보편적인 인간 상태에 대한 판단입니다. 

바울은 구속받지 않은 인류에 대한 세 가지 섬뜩한 진리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전에는 우리도 이런 사람이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였는지를 인식할 때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볼 수 있고,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본래 부르심의 목적에 걸맞는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자입니다.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었다는 말은 실제적인 육체의 죽음이 아닌 영적인 죽음의 상태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한 사실적 진술입니다. 절망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죽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전혀 생명이 없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은 사람들의 허물과 죄로 인해서입니다. 결국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우리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허물과 죄는 동의어로 진실한 것과 정직한 것에서 실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본래 정직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에서 실족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참되고 의롭고 정직하고 올바른 것으로부터 실족되어 있는 인간은 그래서 죄인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죄인됨을 인정할 때부터 복음은 역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6절의 말씀처럼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이고 제일차적인 고통은 인간의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하고,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순종할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불순종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반역자며 실패자입니다. 불순종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적 죽음은 죄가 불가피하게 가져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죽어 있다는 이 진술은 특히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요.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죽은 것처럼 보입니까? 아니에요. 잘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들을 향해 당신은 죽은 자라고 이야기하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당신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당신은 죽었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요? 말하기 곤란하겠지만 그렇게 말해야만 합니다. 

가장 중요한 영역에서 저들에게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체처럼 하나님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떤 갈망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삶은 그 사람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깨어 있다 해도 죽은 것이라고 주저 없이 단언해야 합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 실존의 기본적인 비극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 없이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기 전에 우리가 처해 있던 상태인 것입니다. 세계의 역사는 인간이 타락하였고, 죄 가운데 있다는 이 위대한 성경적인 교리에 비추어서 볼 때에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종이었습니다.

2:2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때 너희는 허물과 죄가운데서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가하고 자유로운 상황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속박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 때문에 아닌 척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다시 날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본성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옛 본성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먼저 사람들은 세상 풍조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는 무관한 전체적인 사회적 가치 체계로 비기독교적 사회에 스며들어 있어 실제로 그 사회를 지배하고,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트랜드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하기보다는 방송과 인터넷 매체들이 전파하는 대중문화에 굴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위 문화적 속박인 거죠. 예수님이 이것들로부터 해방시키실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의 사상과 생활의 물결에 따라 표류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이기에 자정 능력이 없어서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 풍조를 통해 배후에서 우리를 더욱 속박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사탄, 마귀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오늘날 인간은 악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영위하는 모든 유의 삶을 결정 짓고 인간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악한 영적 권세와 힘을 조정하는 자로부터 시작된 원리입니다. 이것들이 집요하게 사람들을 다루어갑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안일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거라고 말입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이 투쟁도 싸움도 없는 그런 유의 구원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악의 영, 모든 교활함과 악의를 가진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그냥 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리하고 스스로를 광명한 천사로 위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속이고, 넘어뜨리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서슴치 않고 와서 그를 시험하던 마귀에 의해서 오늘도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차려야 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깨어 있지 않고 정신차리지 않으면 잡아 먹힐 것입니다.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세 번째 영향력은 내부적인 우리 육체의 욕심입니다.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 의 원하는 것을 하여

육체는 타락하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 욕심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 즉 강한 소원입니다. 사람이 육체의 욕심에 의해서 지배을 받으며 통제당하고 있기 때문에 허물과 죄의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연스러운 육체적 욕구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육체의 욕심이 육체뿐 아니라 정신의 잘못된 욕구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즉 지적 허영과 교만, 잘못된 야심, 탐닉, 중독, 미움, 시기, 질투, 악의등으로 가득 찬 생각 등입니다. 

사람들은 그칠 줄 모르는 욕구, 새로운 스릴과 흥분을 찾아서 줄달음질 칩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에서도 표면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부류에 의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아닌 자기 충족의 발로일 뿐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전에 우리는 안팎으로 억압적 영향력에 종속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세상이요 안으로는 육체입니다. 다시 말해 널리 보급되어 있는 세속 문화와 자기 중심성으로 왜곡된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자체의 지배라기보다는 그 둘 너머에서 그 둘 모두를 통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 사탄, 마귀, 어둠의 나라의 권세 잡은 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비난의 화살을 편리하게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게 종 되었다는 것에 돌리고, 우리는 그에 대한 책임을 하나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고의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겁니다. 

이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았습니다.

구원받기 이전 우리는 죽어 있었고, 종이었고, 그 결과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의 진노와 다릅니다. 언제라도 발끈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이라는 단 한 가지 상황에 대한 신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의롭고 지속적인 적대감, 악과 타협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거부, 그 대신 악을 정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지옥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나게 되요.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갑니다. 23절과 4절의 대조는 그래서 주목할 만합니다. “우리도...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바울은 전혀 어색함 없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넘어갑니다. 진노와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우리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을 제공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본질상이라는 말은 우리의 자연적인 상태, 우리 마음대로 하도록 놓아둔 상태 이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인간 본성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상태이고, 나아가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본질상 죄인이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사람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며,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종이고 하나님의 진로 아래 정죄받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진노의 자녀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위에 머물러 있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순진하고 피상적인 치유책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들에게 바른 조건과 바른 환경을 제공하고 적당한 지식도 주고, 적절한 법을 세운다고 해서 인류를 영적 죽음, 포로 상태 혹은 정죄로부터 구해 주지 못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은 여전히 잘못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했던 곳이 에덴 동산, 낙원이었습니다. 인간이 원래 의로운 조건에서 타락하였다면 하물며 이미 타락한 인간이야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근본적인 병에는 근본적인 치료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포로들을 풀어주며 정죄받은 자를 용서해 주는 복된 소식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밖에는 구출하고 구속하고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바울이 1장 끝에서 말하였듯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아니고서는 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신 그 능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길이 없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살리시고 높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살 수 없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높이실 것입니다. 

이 진리, 이 복음의 소식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주변을 봅시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자들이 보입니까?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신앙이 없는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저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도 저들과 같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를 살리셨던 하나님의 능력만이 저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저들에게도 흘러가 생명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바울이 말했던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음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이었음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음을,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리셨음을 저들에게 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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