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0일 주일설교문
[사망이냐 영생이냐 : 롬 6장 15-2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최초의 인간 아담에겐 수많은 법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자유했습니다. 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에 그만 열매를 따먹고 맙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하나의 법만 지키면 되는데, 그로 인해 다른 수많은 자유함이 선물로 주어진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욕망 때문에 그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아담의 어리석음이 오늘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한 많은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불법을 행하였습니다.
이런 인간의 속성을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인간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라는 왜곡된 생각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바울이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도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아닌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면 그래서 율법이 더 이상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면 이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고, 결국 율법을 폐한다는 것은 죄짓기를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바울의 말에 사람들이 그럼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반론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이런 오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으니
오늘 본문 롬 6장 15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먼저 1절에서 바울은 한차례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질문을 통해 바울은 잘못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알려주고 거룩한 삶에 대한 동기를 찾고자 했습니다.
15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아래에 있음을 발견한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부터는 무엇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지를 촉구 한 것입니다. 법 아닌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가 용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은혜 아래 살아가게 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무엇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자유인으로서 이와 같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께 어떻게 충성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기분에 ‘자유’를 좀 누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결코 도덕적 진공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자유를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자유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죽으심으로 사신 것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가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순종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로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분명 하게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불법적인 행동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불가시적인 영역에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7장까지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실행되어 드러나지 않고, 단지 우리 내면의 생각에 머무는 것까지도 죄를 짓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사망과 의
여기 성화의 과정, 새로운 토대 위에 거룩하게 세워져 가고 있다 하더라도 또 하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새로운 상황에서 갖는 위험 중의 하나는 자기들이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다시금 죄 가운데 빠져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늘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거듭난 이후 우리는 날마다 무엇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가의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모든 인간은 두 주인 중에서 이 주인 아니면 저 주인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죄의 종은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 다시 말해 믿음의 순종은 우리를 의로운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망과 의의 차이를 여러분은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애굽의 노예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광야와 비교할 때 옛날 처지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에게 순종한 결과는 오직 죽음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피부적으로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실감할 수 없지만 훗날 그 차이를 느끼게 될 때에는 모든 후회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을 읽다보면 지옥에 떨어진 자들 중에 살아있을 때 자기 행위를 후회하는 이들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도 본래 죄의 종이었지만 참으로 감사하게도 복음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을 통해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의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복음의 약속을 붙잡고 행동으로 증명하는 신앙입니다. 이 순종을 통해 우리 안에서 주권의 변화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죄는 더 이상 나를 윽박지르고 나의 삶을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주권의 변화에 따른 우리의 비전, 삶의 패턴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거룩함에 이르라
어떻게 수정되어야 합니까? 19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과거에 부정과 불법에 우리 자신을 내주어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불법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은 너무도 부끄러운 일들이었습니다. 21절a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자신들의 범죄행각이 들통 나 붙잡힌 피의자들을 보면 하나같이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자기를 감추려고 합니다. 간혹 당당하게 나오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죄에 대해 부끄러워합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부끄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도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또 죄를 짓습니다. 계속 반복됩니다. 그렇게 괜찮겠거니 가다가 보니 그 끝은 사망입니다. 왜냐하면 23절의 말씀처럼 죄의 삯은 결국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죄가 죽음으로 이어집니까? 궁극적으로 죄는 정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와 함께 삶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리지 못하면 죽음이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기심, 정욕, 괴로움, 교만, 물질주의, 근심, 충동, 두려움 등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 특정한 죄는 우리가 하나님 대신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가 숭배하는 것들은 많은 것을 약속해 주지만 실상 받게 되는 것은 없느니만 못한 것들입니다. 우상숭배의 유일한 혜택이 있다면 그것은 망가짐일 뿐입니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과거 이와 같은 삶에서 속히 벗어나 하나님께 우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성화는 인간 자신의 경건성이나 도덕성으로 이루어지는 자기실현의 대가가 아닙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종으로 드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원리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오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의에게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을 때 우리가 얻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22절b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절b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끝은 사망인 반면에 순종의 끝은 영생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영원토록 동행하는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순종하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 안에서 성장하고, 사랑과 기쁨, 절제, 온유함이 풍성해져 지금 자유를 만끽할 뿐 아니라 영원히 그것을 누릴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어찌 우리가 죄 아래로 돌아가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영생이 아닌 사망에 이르는 길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은 고착화될 뿐입니다. 왜 우리가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라고 하셨는데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유약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왜 여전히 우리의 삶이 힘든 것입니까?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하시는데 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반복되는 죄를 여전히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종으로 내어드려 거룩함에 이르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행동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영역을 마귀에게 내어주지 맙시다. 죄가 활개 치도록 문을 열어주지 맙시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고, 떨어져 나간 문을 새롭게 수리해야 합니다. 죄가 쉽게 보고 넘나들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로서 우리는 그에 부합되게 죄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신이 섬기는 주인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분과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죽음에서 부활함으로써 의롭다 여김 받은 자임을 분명히 알고,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서 우리 자신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우리들을 노예로 만드는 세속적인 주권들이 많습니다. 이런 세속적인 주권들에게 노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일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 길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도록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믿음의 싸움은 영생을 붙잡아 소유하는 것입니다. 죄에 맞서 피 흘리기까지 치열하게 믿음의 싸움을 벌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생을 놓치는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화의 길에서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 하나님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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