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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롬 7장 14-25절

by 최수근 2016. 4. 3.

201643일 주일예배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본문: 로마서 714-25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의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본래 목적이 있으셨기에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으로 부르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되심은 하나님의 기쁨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기쁨이어야 하는데, 이 기쁨이 여러분에게 경험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할 수 있었던 것은 창세기 3장 이후 세상에 들어온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름답게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죄로 인해 인간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적인 죽음의 자리에 놓여 있었고,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이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먼저 손을 내미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해주셨습니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 어떤 죄의 정죄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된 자들에게 주시는 자유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를 얽어매는 그 어떤 세력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셨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누리는 자유가 참으로 대단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로마서 5장에서는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사망의 권세 아래 살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죽음 앞에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6장에서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 가운데 살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죄와 손을 잡을 의무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고 말씀하고 있어도 자유하지 못한 이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새로운 은혜의 질서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살아가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옛 질서의 틈바구니에 끼어 여전히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하며 그 얽매임에 대해서 힘들어하는 구약백성들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걸림돌: 신실성의 문제 

우리가 영화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서야 하는 걸림돌로서 죄와 사망의 문제를 넘어서도, 또 하나의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기 일 수입니다. 그 걸림돌은 바로 율법입니다. 로마서 7장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동일시의 경험을 통해 죄에 대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74절에서는 율법에 대하여도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율법에 대하여 죽게 하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거룩함과 구원이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헌데 교회 안에서 여전히 성도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지 못하고 거기에 눌려 오히려 힘들어 하는 것을 바울은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은 유대인들이 교회로 들어와 주장하기를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오직 은혜로 구원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다고 선포했던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기 시작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 그리스도로 인해 더 이상 구약의 백성이 아닙니다.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로워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 받은 새 언약 백성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밖에서 독자적이면서도 불완전한 인간만의 힘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 구원에 이르는 것은 거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했고, 신실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실성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죄의 노예로 팔려 있는 한 신실성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진정한 성취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냐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처음에 주신 목적이 인간을 힘들게 하시기 위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선한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죄가 지닌 최고치를 이끌어내고, 죄로 그 본색을 드러나게 하고,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이 바로 토라의 특이한 임무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겸손하게 만들어 율법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율법이 죄라고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 합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온 것은 율법이 아니라 죄였습니다. 죄가 그와 같은 선한 목적을 악용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결론을 짓습니다. 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토라가 아니라 라고 하는 인간의 이중성에 있습니다. “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할 정도로 충분한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그것에 순종하여 철저하게 행할 정도의 충분한 그리스도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상황 아래서 문제는 사람들이 성화를 위해 성령을 의지하는 대신 율법을 의지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은혜도 은혜이지만 우리가 뭔가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이 우리에게 힘든 짐이 되어 믿음의 능력을 감쇠시켜 버리고 있습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으로 힘들게 살아가니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이들의 종교는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며 성령이 아니라 육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극적인 것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점입니다. 율법도 그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우리는 사도 바울의 묘사 속에서 율법 아래 살아가는 인간이 이중적인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얼마나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이중적 자아의 대립을 깊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정작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다고 탄식을 합니다.

그 가운데 인간은 탄식하고 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서 거룩함에 이르려는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부정적 감정에 빠지게 만들 뿐입니다. 이것은 모순된 것입니다. 얼마나 비정상적인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법에 사로잡힌 인간의 깊은 고뇌의 탄식입니다. 죄와 율법 때문에 절망에 빠진 인간의 부르짖음입니다.

칼 바르트는 이것을 자기 자신 앞에 선 인간의 경악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육체적 정신적 피곤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곤비한 상태에 이를 때 우리는 절망을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절망의 외침에서 우리는 인간의 헛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다시금 그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의 노력, 정성, 계획, 재기의 의도, 정열 이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 버렸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빠져 나올 수 없는 함정에 깊이 빠져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 우리를 건져 낼 수 있겠습니까?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렇듯 절대 절망의 외침 뒤에 바울은 바로 감사를 선포합니다.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외치는 것은 24절 질문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인간을 사망의 몸에서 건질 수가 있기 때문에 바울은 그 길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 25절 하반 절에서 다시 한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은 비록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려해도 여전히 거듭나지 않은 육신의 한계를 갖고 있어 한발자국도 죄의 법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몸의 분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8장에서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죄와 사망,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에 기초하지 않고, 그밖에 다른 곳에 기초를 두려 할 때 우리는 필시 불안과 낙망과 정죄 가운데 끊임없이 반복되는 어둠의 터널을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뚫고 나아갈 힘이 우리 안에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율법에 종노릇하고 내주하는 죄에 속박되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부활했으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자유 안에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그 길이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그와 같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갑시다. 모든 길이 막혔을 때 마지막 희망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소망이 있습니다. 절망의 늪이 우리를 더 이상 힘들게 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나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 오늘 이 신앙의 길이 기쁨과 행복함의 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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