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주일설교문
[아담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롬 5장 12-21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시내에서 우리교회로 오기 위해 지하철 5호선을 아무 생각 없이 타다보면 간혹 실수할 수가 있습니다. 마천행을 타야 오금역으로 와서 교회로 올 수 있는데, 마천행인지 확인하지 않고 탈 경우 상일행을 타는 바람에 반대방향으로 가다가 다시 강동역까지 되돌아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이 실수를 했습니다. 이 일이 어쩌면 사소한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잘 가던 열차가 어느 순간에 갈림길에서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에 그만큼 소소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매우 중요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다 보면 선택의 길목에서 고민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망이냐 생명이냐 선택의 문제는 그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선택은 단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이미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모든 사람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은 그 자리에 그냥 바보처럼 머물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서 나올 것인가의 선택입니다. 여기에 대해 그 어떤 지식도 없이 그냥 잘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 그들의 반응은 뻔합니다. 왜 그래야만 하냐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들어오고
요즘 세상은 개인주의로 팽배해져 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그 책임을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낯선 일입니다. 우리나라도 연좌제, 연대 책임, 연대 보증이란 말도 옛 말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향 때문에 로마서 5장 12절 이하의 말씀은 서구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필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본문입니다. “어떻게 그 하나의 행위가 나의 현재의 상황과 영원한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까?” 역 질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앞부분에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죄악상을 이야기 하고, 어떻게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을지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 논해온 바울은 12절 말씀을 통해 매우 듣기 거북스러운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대표성을 지닌 첫 사람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고, 죄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다는 주장을 선뜻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아담이 내 운명을 선택했다. 그가 불순종한 것으로 내 운명이 결정 되었다.” 이건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렇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난 잘하고 있는데, 난 선하게 잘 살고 있는데, 아담의 원죄 때문에 죄인이 된다는 사실이 억울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들을 향해 바울은 12절의 말씀을 통해 모든 개개인이 자신의 죄를 더함으로써 이미 죄에 사로잡혀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은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악한 선택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항했던 한 사람 아담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8-3:20에서 그런 죄의 권세 아래 죄를 짓고 살아가는 이들의 면면을 이야기 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분명한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죄에 의해 부패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망이 왕 노릇
그렇게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결과 성경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한 사람 아담 이래로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와 실존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강력한 지배하에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렇게 쉽게 피하거나 탈출할 수 있는 죄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그 능력을 깨뜨리려고 죽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이 오늘도 어느 길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이 말씀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아담은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하셨지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이야말로 마땅히 받을 벌이지만 그와 같은 범죄를 짓지 않은 이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닙니까?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음의 운명에 놓인 것은 분명 슬프고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아담으로 인해 사망이 모든 인류 가운데 왕 노릇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또 다른 가능성을 그들에게 열어놓았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한 슬픔과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아담이 범죄 한 순간부터 예비하셨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각자가 그분의 천국 보좌 앞에서 개별적으로 자신을 대표해야 한다면, 우리를 지켜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을 넘쳐나도록 주셨습니다. 15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넘쳐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죄밖에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인류가 황폐하게 망가져 버린 바로 그곳으로 친히 오셨습니다. 오신 목적은 과거를 단순하게 회복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당신의 피조물을 처음 만드셨을 때보다 훨씬 더 나은 새로운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예수님을 붙잡을 것인가, 그냥 아담으로 인한 죽음의 자리에 머물 것인가의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정죄와 의롭다 하심
거기에서 어느 길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정죄냐 의롭다 하심이냐!!!” 그 결과는 확연하게 달라 질 것입니다.
16절 “또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아담 안에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사망의 권세 아래 살아야 하고, 그 죄의 짐을 우리 스스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은혜가 넘쳐난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 있다면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케 하심으로 의롭다 하심에 이를 뿐만 아니라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죄의 결과는 죽음의 지배였습니다. 타락과 붕괴의 최종 단계인 죽음이 온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였습니다. 그 끝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18절의 말씀처럼 생명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놓였던 자가 생명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왕 노릇한다는 것은 소위 인생역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여러분의 인생이 결코 시시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킹십을 부여받은 자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권세를 주셨습니다.
순종과 불순종
이와 같은 생명과 죽음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범죄는 불순종으로부터 발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죄가 들어왔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되었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선하지만 가끔씩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기본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흠 때문에 계속해서 죄의 구체적인 행위를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함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려야 했지만 실패했던 신실한 순종 모두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순종의 결과로 새로워진 인류는 현재 시점에서 이미 ‘의롭다’는 선고를 받을 뿐 아니라, 미래의 ‘생명’도 확신하게 되고, 나아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저질렀던 일로 인한 결과를 무효케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인류를 새로운 목적을 향할 수 있게 방향 전환을 시켰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어떤 결과를 거머쥐게 될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 곧 세계를 바로잡으시려고 계획하신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회복과 구원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실하게 행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로, 무엇보다도 순종의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위를 통해 언약 안에서 언제나 그려왔던 죄와 죽음이 패배를 당하고 그 대신 은혜와 생명의 비밀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책감은 물러가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안에 밀려 오는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오늘도 우리 안에서는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전쟁은 선과 악 사이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는 세력은 죄책감과 은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죄책감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자기부인, 열성적인 종교생활, 봉사 등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방법들은 아담이 나뭇잎으로 자신의 불순종을 가릴 수 없었듯이 우리 안에 죄책감을 덮을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은폐 엄폐 된 죄가 잘 숨겨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게 된다면 우리의 죄를 감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롬 5장 20절 말씀에서 율법의 기능은 우리의 죄를 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죄가 꼭꼭 숨어버린다면 어떻게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죄가 드러남으로써 주를 바라보게 되고 주의 은혜가 넘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숨기를 그만두고 하나님 앞에 나와 우리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주시는 은혜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담에서 시작된 옛 사람의 자리에서 나오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청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가 살 수 없는 죄 없는 삶을 살게 하셨고, 우리가 죽어야 할 속죄의 죽음을 죽게 하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사 새 생명을 얻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실존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그 선물은 은혜로 거저 주어지고 믿음을 통해 받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담에 의해 이미 갈 곳이 결정된 인류에 속하던지 아니면 그리스도에 의해 갈 곳이 결정된 새로운 존재에 속하던지!!!
오늘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습니까? 믿는 다면 그 사실 자체로 우리는 왕 노릇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라는 신분을 떨쳐버렸습니다.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이면 서 왕권을 가진 자입니다. 그 자리, 그 권세를 결코 상실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고 나가십시오.
우리는 그에 걸맞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삶은 바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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