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3일 주일설교문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입니까? 롬 6:1-11]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들은 자기 의, 자기 절제, 자기 수련, 정신의 고양, 공덕, 선행. 고행 등으로 신과 합일을 이루고 자기 의지로 구원이나 해탈,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의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진 의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여김을 받고, 구원받는 것이지 우리의 도덕적 노력은 구원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선행이 구원을 얻는데 무가치하다면 왜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합니까?” “선한 삶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그 메시지가 우리를 부도덕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문을 여는 것은 아닐까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돌아온 탕자가 “또 그런 일을 저질러 볼까? 먹고 살만큼 재물을 챙겨 몇 주 동안 집을 나가 실컷 놀다가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오면 어떨까? 나에게 또 한 번 잔치를 베풀어주실까?” 생각하고 예전처럼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그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냐?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주변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람쥐쳇바퀴 돌듯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 복음에 대해 잘못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회의주의자 볼테르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 주실 거야.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잘못 가도 한참 잘못 간 것입니다.
요즘에도 교회가 전해야 할 말씀이 바로 용서의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포용적이어야 하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다고 말해야 교회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란 “괜찮아요,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지옥 입 밖에 내기가 어렵습니다. 단테의 신곡 같은 이야기하면 고리타분하게 여길 것입니다. 복음이 왜곡되어도 너무 왜곡되었습니다.
바울이 은혜로 구원받는 다는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도 이런 식의 주장에 계속 부딪혔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죄의 책임을 분명하게 묻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건제를 드리게 하신 이유도 죄짓고 회개한 다음에 나 용서받았으니까 나 몰라라 하는 일이 없게 하는 데 있습니다. 죄의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죄는 은혜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1-2절a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함의 은혜를 입고자 죄를 지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하여 이미 우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2절b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더 이상 죄가 우리 안에 없다거나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거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는 여전히 세상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는 그 영향력이 다릅니다. 그 전에는 죄로 물든 욕망을 죄 된 것으로 알지 못할 만큼 그것이 우리를 지배했고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 받고 구원받은 이제는 죄가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심으로 죄의 요구를 충족시켰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형벌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 대항하고 저항할 수 있습니다.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죄에 빚진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에 굴복할 가능성이 완전하게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굴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는 죄에 대해 복종할 의무가 없어진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 삶 속에 새로운 능력이 역사해서 우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에서는 여기에 대한 영적 자각을 촉구하였습니다.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죄에 대해 죽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시작인 세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내적으로는 믿음으로, 외적으로는 세례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었고, 그럼으로써 우선 자신이 죄의 권세로부터 풀려났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해방은 법적으로 원하지 않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게 하지만, 그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해방된 사실을 알지 못하면 여전히 종속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4절은 그와 같은 세례의 결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목적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무엇보다도 먼저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신분의 변화에 따라 살려면, 그 변화를 인정할 뿐 아니라 새 사람에 맞는 실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고 나서 새로운 책임을 회피하거나 무시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무를 수는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탄만이 기뻐할 뿐입니다.
그보다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고자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새롭고 풍성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경험하기 위해 밟아야 할 첫 단계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아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아직도 자기 안에서 일하는 옛 아담 혹은 옛 사람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들은 바울이 이 본문에서 명백히 진술한 것, 곧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다는 것과는 다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우리로 하여금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옛 사람은 옛 본성으로 불리는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회심 이전의 우리의 상태, 즉 우리 전부입니다.
죄는 이런 옛 사람의 자연적 본능을 왜곡시키고, 졸림을 게으름으로, 배고픔을 탐욕으로, 성적 욕망을 육욕으로 격하시켜서 우리의 몸을 악한 목적을 위해 이용합니다.
십자가의 핵심은 우리가 일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나면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죄에 예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7절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일단 죄에 대해 죽은 다음에는 죄가 우리에 대해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모든 혐의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 중간쯤입니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중간 지대에 있는 것입니까? 어정쩡하게 죄를 짓기도 하고 또 회개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는 상태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 곧 가장 참된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의 법과 거룩함을 사랑해야 할 자리에 서 있습니다. 강력한 죄가 내 속에 남아 있지만, 내 속의 죄는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려 들지만, 이제 죄 된 행위는 나의 가장 깊은 자기 인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 사람과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죄가 더는 내 인격과 삶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해 행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담 안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가 이제는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터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10절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거기서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온전히 연합함으로써 우리가 누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는 것”은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옛 본성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것이 마치 죽은 것처럼 가장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체는 금방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헤아려보고, 판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는 자로의 전환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세례로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노예로 잡아두는 죄의 능력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죽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는 특권이나 법적인 권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사실이고 효력을 발휘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권리나 특권을 지각하지 못해서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엄청난 특권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실현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에 대해 죽은 것으로 우리 자신을 여겨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특권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누리며 살 때 그것이 내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로서 더 이상 죄에게 우리의 행동과 삶을 굴복하여 내주지 않아도 됩니다. 타락한 존재였던 우리, 그로 인해 죄의 지배를 받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후에 처음으로 죄 짓지 않을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세례의 결과로 얻게 되는 영광스런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닌데, 경험적으로는 여전히 노예라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오늘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 비결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 순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며, 하나님께 거룩한 삶으로 응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반면에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죽은 자로 반응하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 죄의 청정지역을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기 전까지 죄는 다양한 루트를 통하여 우리 주변을 맴돌며 여전히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결정해야만 합니다.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길지, 아니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를 말입니다.
이 두 갈래 선택의 길목에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자신을 여기고 좁은 문으로 나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성화의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순간에 바뀌지 않습니다. 이 걸음들이 모아지고 모아져서 어느 날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불의의 병기가 아닌 하나님 앞에 의의 병기로 우리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일예배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롬 7장 14-25절 (0) | 2016.04.03 |
---|---|
사망이냐 영생이냐 : 롬 6장 15-23절 (0) | 2016.03.20 |
아담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롬 5장 12-21절 (0) | 2016.03.06 |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 롬 4장 18-22절 (0) | 2016.02.14 |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까? : 민 25장 1-13절 (0) | 2015.11.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