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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선교적 삶으로의 초대: 마 10장 1-10절

by 최수근 2023. 1. 1.

2023년 1월 1일 주일예배

[선교적 삶으로의 초대: 마 10장 1-1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오늘 새해 첫날 드리는 예배의 자리에 어떤 마음과 소망을 갖고 나오셨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의미 있는 응답을 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다짐하며 예배의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분명한 계획을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계셨습니다.

에베소서 14-6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늘을 향하여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거룩한 예배자의 삶으로 부르셨고, 땅으로는 받은 은혜와 사랑, 하늘의 신령한 복이 흘러가는 통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하늘의 복이 많은 이들에게로 흘러가도록 목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풍성한 삶의 은혜와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세상으로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축복과 구원의 통로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바로 선교적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막상 이 삶으로 초대하셨을 때 그에 합당한 행동들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부르심의 목적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가 선교적 삶으로의 초대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과 행동들이 필요할까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다가오셔서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말씀하시며 선교적 삶으로 부르실 때, 두 사람은 그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아버지와 품꾼들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 뒤를 따랐습니다. 세리인 마태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실 때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기득권을 뒤로한 채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이렇게 선교적 삶으로의 초대에서 첫 번째 응답은 먼저 자기를 비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왜 비움을 요구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전도를 위해 둘씩 제자들을 짝지어 파송하시는 장면에서도 이 비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0:9-10에서 예수님은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집을 떠나 전도 여행을 떠나려고 하면 기본적인 생필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예수님은 금하셨습니다.

왜 이런 극단적인 요청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은 지금 휴가 여행을 가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사 문제와 관련된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제자들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 제자들의 관심이 자기의 안위를 추구하는 일에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생사에 대한 긴급한 메시지를 외쳐도 제자들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안락한 삶에 관한 관심은 제자들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훼손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세상의 가치에 얽매여 있으면 있을수록 세상에서 구별되기 어렵고, 이것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의 검을 무디게 만들어 결국 세상을 향해 진리를 선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면 제자들의 존재가치는 사라지고 맙니다. 이들로 인해 그 땅에 그 어떤 생명의 역사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대한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기 신변에 대한 염려로 인해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비워야 할 것을 예수님은 요청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솔직한 심정으로 말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생각해볼 때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자책만 커 갑니다. 교회가 힘을 잃고 있는 것도 자기 부인의 부르심 앞에 진지하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볼 때 교회가 힘을 잃었던 시대를 보면 교회가 교회의 안일함과 풍요로움 가운데 빠졌을 때였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누리기 시작할 때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영적인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의 교회도 개신교가 들어온 이래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특히나 80년대 부흥기를 거치면서 작은 교회에서 대형교회로 급성장하는 교회들이 나왔고, 또 가난했던 교회들 가운데에서 부자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성장하면서 한국교회는 교회가 태동하던 초창기 시절처럼 소외당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가가기보다는 기득권층에 서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나눔과 섬김이 아닌 갑이 되어 베푸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이것이 대다수 한국교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찌 보면 작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분리해서 교회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작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본다는 거죠. 결국 이런 교회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교회는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2020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즉 기윤실에서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조사하였습니다.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201048.4%였는데, 10년이 지난 2020년에 국민의 63.9%가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하였습니다. 60%가 넘는 국민이 한국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고 있지 않으며, 사회문제 해결과 통합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 겁니다. 부끄러운 통계치입니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신뢰를 잃어버리기 시작하면서 그간에 꾸준히 늘어나던 개신교의 교인 숫자가 심각하게 줄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더욱 그 감소세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신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자기를 부인하고 따를 것을 요청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비워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막혀 있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오늘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사항입니다.

이렇게 세상적으로 채워졌던 우리 자신을 비워야 우리가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교적 삶으로 나아가는 두 번째 단계는 채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명하고 계신 제자들의 선교는 세상에서 예수님 사역의 확장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음성과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도록 보내신 것은 큰 모험입니다.

우리가 본 제자들의 모습은 전혀 칭찬받을 만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면에서 부족했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채워 넣어주실 공간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최소한 자기를 비우고 예수님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둘씩 보내시면서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과 병 고치는 권위와 능력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이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침과 능력에서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대리자로 행하도록 권세와 책임을 부여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채워주신 겁니다. 이 채움이 없이 나가면 우리는 선교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내 능력, 내 지혜가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로 충만하여 세상으로 파송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비움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를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나를 철저하게 비웠을 때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닌 그리스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셔서 사람들의 병도 낫게 하셨고, 악귀도 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옆에 이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술을 부리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귀신 들린 자들을 붙잡고 명령하였습니다.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그때, 귀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겨버렸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이들이 명령한 것은 바울의 예수님을 통해서이지, 자기가 고백하는 예수님,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채움이 없는데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채워짐이 없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채워주시고 세상으로 제자들을 내보내셨을 때 제자들은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주었고, 그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전역으로 흩어져 전하고, 고치는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나누었고,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사람들의 필요도 나누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로서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를 내려놓고, 우리 자신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져서, 우리 안에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분의 권세를 통해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고, 어둠과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자들에게 예수 안에서 해방됨의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바로 이 나눔이 선교적 삶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물론 복음이 전파된다고 해서 널리 환영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길에 많은 방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장애물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침묵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선교적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하는 제자들이 끊이지 않는 한 이 세상의 수많은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와 같은 세상의 차가운 반응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치유와 구원의 복음을 나누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으로의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움과 채움과 나눔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육신적인 삶을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들로 하여금 살기를 요청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선교적 삶입니다.

온전히 비우는 삶, 예수님으로 채우는 삶, 그리고 채운 것을 나누는 삶, 비움, 채움, 나눔, 이와 같은 선교적인 삶이 우리 가운데 계속 순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크고자 하는 마음, 보상심리, 자만심, 헛된 열심 등을 비워내고 대신 그리스도로 채우는 일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거룩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결코 행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지체인 몸으로서의 교회라면 세상으로부터 당연히 외면당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적인 삶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성도들의 삶의 공동체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지난 우리의 실패는 생각하지 맙시다. 다시 우리를 비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움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우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적 삶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는 비움으로 시작되었듯이, 아브라함이 그 믿음의 시작을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했듯이, 선교적 삶으로의 초대에 응답하기를 위해 반드시 비움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를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워져 저세상으로 나아갑시다.

그래야 우리 안에 충만한 예수님의 생명이 죽음의 권세 아래 신음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흘러가 생명 살리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선교적 삶의 헌신을 통해 살리는 역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올 때, 이 땅의 교회는 존재가치를 세워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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