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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 마 9장 9-13절

by 최수근 2022. 12. 5.

2022년 12월 4일 주일예배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 마 9장 9-1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어제 포르투갈과 치른 월드컵 경기는 수민이의 기도대로 기적적으로 이겼고 16강에 진출했습니다. 월드컵 조별 경기를 치르는 내내 실은 아쉬움과 논란이 있었습니다. 특히 벤투 감독의 이강인 선수 기용 문제였습니다. 이강인을 처음부터 선발로 뛰게 했으면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에서 제기된 문제입니다. 월드컵 지역 조별 예선전에서도 유독 이강인은 벤투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빌드업을 중시하는 경기에서 수비 압박이 필수적인데 수비가 약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수비수였던 김태형 감독은 라디오의 한 인터뷰에서 어떤 선수를 필요로 하는 것은 감독의 결정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전체 경기에 전술적 필요에 따라 선수를 뽑을 수도 있고, 설령 뽑더라도 경기마다 감독의 필요에 따라 전체를 뛰기도 하고 후반전 조커로 나와 뛰기도 한다는 거죠. 혹은 끝내 벤치만 달구다가 대회를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바깥에서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벤투 감독은 자신이 그리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필요에 따라 선수를 기용했고 마침내 좋은 결과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필요한 선수들을 뽑는 깐깐한 감독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단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찾아와서 예수님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그들의 선택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필요에 따라 직접 대상자들을 찾아가셔서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이들은 세상이 보는 기준과는 참으로 동떨어진 자들이었습니다. 소위 그 시대의 루저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을 위해서 일하면서 그 권세를 등에 업고 사람들에게 세금을 무리하게 징수하여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유대 사회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 이들 매국노들을 유대의 기본 공동체인 회당에서 출교시켜 버렸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세리 마태는 가버나움 변두리 해변의 끝을 통과하는 지역에 세워진 세관에서 이 지역을 넘나드는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가시다가 마태를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급작스러운 부름은 마태에게도 당황스러운 일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마태는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의 거절할 수 없는 권위라 그가 즉각적으로 순종했던 걸까요? 도대체 마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걸까요?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전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의 여느 사람들처럼 많은 군중 틈에서 예수님을 지켜보았을 겁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뜨거운 잇슈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을 것이고, 환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도 보았을 것입니다. 마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 마태복음을 보면 처음부터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강력한 기억을 갖고 있었습니다. 4장에서 메시아로서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5-7장에서 산상수훈의 말씀, 8-10장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증거들, 마태는 엄청난 도전을 받았던 거죠.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자기 앞에 서서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으니 마태는 심장이 터지는 듯했을 겁니다.

주님의 선택도 우연이 아닙니다. 마태가 필요하셨고, 그를 제자 삼기로 작정하셨기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태를 한 번 찔러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그를 필요로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는 일도 같습니다. 어쩌다 뽑힌 그저 그런 선수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대표선수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조각의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전까지 세리로 살았던 마태의 생활이 어떠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그의 일과를 보면 무더운 세관에 앉아서 이곳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겠지만,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마냥 즐겁고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좋았더라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을까요?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예수님을 비웃었을 겁니다.

마태는 사람들을 수탈해 부자는 되었지만, 그것이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외치시던 주님의 음성은 그의 답답한 마음에 파장을 일으켰을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태는 의미 없는 시간 속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가 주저함 없이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마음속에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생각이 있어 가능했던 겁니다. 하지만 어찌 나 같은 자를 예수님이 제자로 불러 주실까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자기를 제자로 부르시니 마태는 너무 놀라면서도 거부할 수 없었던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두 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모든 사람에게 경멸당하고 미움을 받고 있던 한 사람, 세리 마태에게 일부러 신경을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스승이 그에게 옴은 지금까지의 고독이 치유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을 만날 때 누리는 축복이라고 믿어요.

다른 하나는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세금 징수는 돈이 벌리는 직업이었습니다. 그 자리를 버린다는 것은 돈을 버리겠다는 결단이고, 다시 그 일로 돌아가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마태는 자신의 현재의 삶을 탈피하고 메시아를 따름으로 뭔가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 기대가 돈보다, 안정적인 직업보다 컸기 때문에 마태는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안정된 직업과 세리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를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한 것을 통해 마태는 우리 자신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져보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명령하셨을 때, 과연 이 명령에 주저함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뒤를 쫓아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마태는 보장된 직업과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좇겠다는 결정은 때로 어렵거나 고통스러운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때 우리가 내려놓는 것들보다 주님을 따름으로써 누리는 것들이 더욱 큼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고민하지 않게 되겠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따른 마태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위해 자기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연회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는 왜 이와 같은 일을 계획했을까요?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결정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돌아갈 다리를 끊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동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들 또한 자신처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이 바뀌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만난 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런 마태의 초대에 예수님은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하지만 세리의 초대에 응해 그 집을 방문하는 일은 유대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 이방인과의 식사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태의 집에 가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으니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마태의 초대에 응하신 것은 잘못 굳어버린 율법적인 틀을 깨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이 어떤 것인지, 앞으로 세워질 교회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의 위로가 되고, 그들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심을 선포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경직되고 좁은 소견으로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따지듯이 묻습니다. 11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죄 사함의 권세를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은 메시아로서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음에도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그냥 넘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실제 율법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관습에 철저하게 매여 있었던 거죠.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이들이 되려고 하면 우리 안에 전제들, 우리 자신의 원칙들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 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 없는 종교 생활을 할 뿐입니다.

바리새인의 이와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죄인의 대명사처럼 여겼던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의 교제를 나눔으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 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한 행동 언어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이 공동식탁에 참여하는 용서와 긍휼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들의 의를 내세워 그렇지 못한 자들과 편을 가르고 그들을 무시하고 고립시키는 나라가 아닙니다. 반면에 이 땅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의인과 죄인을 나누고, 진영과 진영을 나누어 정죄하고 싸우기 바쁩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방인, 죄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더럽혀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속으로 과감하게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러 온 의사로서 병든 자를 치료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의사로서 지금 반드시 살려야 할 자들과 함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건강하다고 확신했기에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했던 한 세리의 모습에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섰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에 굶주려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땅의 죄인들을 향해 그 어떤 긍휼의 마음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품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피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심각한 영적 오류에 빠진 이들에게 예수님은 호세아 6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좀 가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면서도 제의적 실천에만 의존하여 거기로부터 자신들의 거룩함의 근거를 찾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보이는 것은 아닌지? 바리새인들은 마태와 같은 세리와 죄인들을 경멸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참을 수가 없으셨던 겁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지 종교적인 열심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마태와 같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를 때 그들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잔치에서 불쌍한 이웃을 밀어내어 버렸습니다. 자기들이 세리와 죄인들과는 달리 의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두 죄인입니다.

이렇게 의사가 필요 없는 건강한 사람이요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3b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예수님은 죄 가운데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끝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의를 과시하는 자들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자기의 의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굳은 죄성을 보려 하지 않았던 겁니다.

죄라는 영적인 질병은 종교적인 의를 시도함으로써 치료되지 않습니다. 죄는 오직 위대한 의사이신 예수님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은 영원한 죽음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거룩함과 의를 내세우는 자들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전혀 그렇지 못하지만, 그들 안에서 어떤 종교적인 가능성도 갖고 있지 못한 자들이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했던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예수님을 보신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서도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이들은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 소망도 없는 작은 자들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외쳐도 예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약한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셨기에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부름을 받았지만 벤치에만 앉아 있다고, 별로 하는 일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한 조각입니다. 세리 마태가 변하여 사도 마태가 되었듯이 우리는 주님의 필요에 따라 아름답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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