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7일 주일예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장 1-8절]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보면 참으로 비극적인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제주 4.3 사건입니다. 1947년에서 1954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7년간 군경의 무력 진압으로 당시 제주도민의 8분의 1 이상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때 희생된 많은 제주도민의 가족들은 정부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시간이 참 길었습니다. 다행히도 이들에 대해 국가가 피해를 인정하고 배상하기로 해서 74년 만에 보상금을 받게 되었는데, 보상받은 이들 중에 여러 명이 보상금 일부를 제주 4.3 관련 재단에 미래의 교육을 위해 써달라고 기부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불행과 그로 인해 겪은 후손들의 아픔이 이 땅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이념적 갈등으로 야기된 사건들의 많은 피해자와 가족들이 겪은 고초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곱지 않은 사회의 시선, 차별, 불이익 등 연좌제의 족쇄로 인해 이들은 평생 죄인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연좌제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타자를 정죄하고 현대판 연좌제 사슬로 고통받게 하는 일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행한 사건이 반복되어 많은 이들의 삶을 짓밟아 놓는 비극이 그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다른 이들을 쉽게 정죄하는 일부터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기독교가 먼저 타자를 정죄하는 일에 앞장섰던 일이 많습니다. 이건 지난 2000년 전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고착된 율법의 잣대로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과 이방인들을 정죄했던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타자를 정죄하는 일에 앞장선 이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이런 정죄의 모습들은 율법의 영역을 넘어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까지 이어져 가뜩이나 질병의 고통도 버거운데, 질병을 죄의 산물로 여기어 정죄하는 통에 이중의 고통을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요 9장에서 제자들이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되 자를 보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2절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건 시각장애인을 향한 제자들의 폭력입니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어요. 여러분은 암이 죄로 인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을 수 있나요? 그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위로는커녕, 물론 앞에서는 위로하지만, 뒤로 가서는 수군거리기 일쑤입니다. “목사가, 장로가, 권사가, 집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정죄하기 바쁩니다. 이렇게 위로보다는 정죄하기 바쁜 이들을 향해 우리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9:3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런 타자를 향한 끊임없는 폭력의 사슬을 끊고자 하셨습니다. 정죄라는 폭력 앞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이 더는 그로 인해 신음하지 않고, 자유 하도록 회복시켜 주는 일을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목적하심이 거라사의 광인을 치유하시고 온 직후에 가버나움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앉거나 선 채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멘 채로 이곳에 왔습니다. 대부분 환자를 치유하실 때 보면 예수님이 환자에게 다가가시거나 그들이 소리 질러 예수님께 부르짖어 간청하곤 해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띄거나,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뛰쳐나온 겁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다른 사람들이 들 것에 누워있는 중풍 병자를 메고 왔습니다.
이 장면이 자연스러워 보입니까? 보기 좋아 보입니까? 네 사람이 예수님 계신 곳까지 중풍 병자를 들것에 메고 나아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유대 사회가 질병에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긍휼의 마음이 아닌, 죄가 질병의 원인이라고 믿었다는 점에서 병자를 죄인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라는 못에서도 38년 된 병자가 병을 고치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어 오랜 기간 방치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치유해주셨습니다. 결국 유대 사회가 수많은 병자를 죄라는 멍에를 씌어 밀어내버린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아픈 이들을 도와주려고 하겠습니까? 그들은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며 치유하여 주셨던 겁니다. 지금 네 명의 사람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중풍 병자를 메고 왔습니다. 그들은 중풍 병자를 죄인으로 보지 않았고, 긍휼히 여겨야 할 형제로 보았던 겁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중풍 병자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2절 말씀을 보면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이들 네 사람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 마태복음 9장에서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에서는 이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남다름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을 상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보니 사람들이 실내에 너무 가득 차서 비집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요즘처럼 도로에서 구급차가 지나갈 때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리는 것을 여기에서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환자들을 대하는 사회 통념상 자리를 비켜줄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보통 이 지경이 되면 포기하기에 십상입니다. 하지만 포기할 그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들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고,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옥상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를 달아 내리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실행했고, 예수님 앞에 중풍 병자를 달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순간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친구들의 열정과 믿음을 보셨습니다.
중풍 병자의 간절함과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이들의 마음이 어우러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남의 지붕까지 뚫고 환자를 달아 내릴 생각을 했겠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며 예수님께 들것을 내렸을 때 분명 예수님은 그런 무례를 문제 삼지 않으시고 중풍 병자를 치료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도저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정도 되면 중풍 병자는 심리적으로 친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다음 기회에 예수님 앞에 나가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붕을 뚫은 것을 보면 네 사람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중풍 병자가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으라고 해도 친구들이 그렇게까지 하기를 거절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상황에 밀리지 않고 반드시 예수님 앞으로 가 병을 고치리라는 흔들림 없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정 앞에 서게 되면, 그것을 넘어 나아가려 하지 않고 주께 나아가기를 나중으로 미룰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완화되면 해야지 하는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이 가득 차 도저히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 같은 일들이 실은 매일 일어나고 있어요. 그럼 점점 더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밀려나는 거죠. 이 반복되는 틀을 깨어야 합니다. 어떻게든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종종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가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그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공동체적 활동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우리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느끼지 못할 때, 은혜의 결핍으로 심령이 메말라질 때, 삶의 커다란 문제에 직면해서 낙심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믿음과 통찰력과 중보기도에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그럴 때 오히려 공동체를 떠나 스스로 숨어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죽습니다. 홀로 고립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 살아있는 몸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위로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지만 이것은 누워있는 중풍 병자와 환자를 짊어지고 온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들이 듣고 싶은 말은 “네 병이 나았다. 일어나 가라!”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네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유대의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긴 시간 고통을 받아 왔을 중풍 병자의 내면에 문제를 먼저 해결하여 주신 겁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게 하고, 사회공동체로부터 소외되었던 그의 삶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중풍 병자에게는 내적인 치유가 필요했던 겁니다. 아마도 그는 사회의 폭력적인 정죄 앞에서 죄로 인한 죄책감에 눌려 육신뿐만 아니라 심령까지도 중풍에 걸려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폭력적 정죄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주신 겁니다. 그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구속과 완전한 회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죄 사함의 선언을 통해 예수님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만을 놓고 보면,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올려드릴 때 가능한 일인데, 지금 한 가정집에서 그것도 제물 없이 죄 사함을 예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그곳에 있던 서기관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3절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을 예수님이 행한다고 하니 서기관들에게 그런 예수님의 말은 “내가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들렸고,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었던 거죠. 서기관들의 생각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절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품은 생각이 왜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말씀의 전문가들인 서기관들은 예언자들의 예언을 통해 메시아의 때가 오면 하나님이 자신의 역할을 '인자와 같은 이'에게 위임하실 것이고 그 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위가 이 세상에 행해질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상황을 전혀 예언의 말씀과 연결을 시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간에 행하여 오신 기적들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무시해버린 결과입니다. 그 점에서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진실을 향하여 자신들의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죄로 인해 병든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는커녕, 오직 예수님을 대적하고 그를 궁지에 몰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렇게 신성모독으로 몰아가고자 한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 결국 성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비틀어진 서기관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같은 장면 안에서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네 사람의 선한 생각을 보셨고, 서기관들에게서는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시는 일을 가로막으려고 하는 악한 생각을 보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점은 이렇게 악한 생각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면서도 성경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과 경험 속에 갇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종교적인 폭력으로 타자를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는데, 그 사랑을 외면하는 꼴입니다.
그 점에서 극히 제한적인 내 생각, 내 경험에 갇혀 있어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우리를 맞출 수 있도록 생각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은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는 겁니다. 이게 서기관들의 악한 모습이요 악한 생각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5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 질문에 서기관들은 난처했습니다. 그들 자신이 어느 것도 할 수 없는데 무엇이 쉽다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에게 이것은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둘을 행할 수 있는 권세를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던지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인자’라는 용어는 ‘메시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심으로써 한 영혼을 향한 죄의 용서와 함께 그를 구원하시고, 치유의 선물까지도 주시는 메시아이심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신 후에 드디어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명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처음엔 그를 향해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그에게 실제적인 치유를 행하셨습니다. 꼼짝 못 하고 누워있던 그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침상에 누워있던 중풍 병자는 즉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와 친구들의 믿음으로 인해 완벽한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런 권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8절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러나 마태가 분석하는 군중의 상황을 보면 여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 되심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풍 병자를 치유하신 과정에서 분명히 메시아로서 증거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완악함과 무지함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현장이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펼쳐진다고 했을 때 이것보다 더 좋은 상황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주목하여 보신 네 사람의 선한 생각과 믿음을 공유한 이들은 여전히 소수이고, 귀와 눈을 가로막고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서기관들의 악한 생각과 무리의 영적 무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자기를 내어주시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 소외된 이 땅의 낮은 자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셨던 예수님을 신뢰하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울어주고, 그들의 상한 심령을 위로하고,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든든한 이웃이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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