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5월19일 주일설교문
[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행2장1-13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오랜 시간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변화해가는 경우도 있지만 믿음의 삶에선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이동해가는 과정에서 급격한 터닝 포인트가 있곤 합니다. 경험해보셔서 알겠지만 새로운 변화, 쉽지 않습니다. 자기 의지만으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그 점에서 3년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끈질기게 붙잡고 있던 그들의 자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변화의 동력, 지금까지의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새로운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채워지게 됩니다.
임재: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다!
제자들은 사도행전1: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선물을 기대하며 기도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장1절을 보면 오순절 날까지 120명의 제자들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1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10일째 되는 날 오순절까지 그들은 변함없이 기도하였습니다. 한 시간도 깨어 기도하지 못하던 제자들이 어떤 변화의 조짐도 없이 십 일간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기도의 바다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들로 하여금 10일간 기도하면서 오순절까지 이르게 하셨을까요? 그건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엔 하나님이 의도하고자 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날은 농경 축제였습니다. 농부들이 그 해 작물의 첫 단, 첫 열매를 가져다가 감사의 표시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작물들도 무사히 거두어들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이나 오순절은 단순한 농경축제만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오랜 기억을 지배하는 위대한 이야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신 출애굽 이야기를 일깨우는 축제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실 때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구원받은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그날 밤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시내광야로 갔습니다. 유월절이 지나고 50일 후에 그들은 시내산에 이르렀고, 모세는 거기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50일째를 의미하는 오순절은 단순히 추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첫 단, 첫 열매와 관련된 것만이 아닙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이 구속하신 자기 백성에게 앞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삶의 방식을 지시하신 날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의미 있는 오순절에 하나님은 기도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성령을 보내주셨고, 성령시대, 즉 교회시대를 열어가는 첫 열매, 첫 단으로 저들을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성령강림을 통해 새 언약의 계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10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동요하지 않고 한 곳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약속하신 날인지 그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령은 믿음의 공동체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으기 위해서 오십니다.
이처럼 성령강림을 통해 새 시대를 열어갈 120명의 무리는 예수님과의 집중된 40일간의 특별한 훈련과 열흘간의 전심기도로 예열된 공동체였습니다. 오순절 당일이 되자 성령은 이처럼 기도의 제단에 바쳐진 공동체를 향하여 강하게 임하였습니다. 왜 우리가 모여서 기도합니까? 왜 우리가 모여서 말씀훈련을 합니까? 그래야 성령 충만하고, 성령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열을 마친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것도 은밀한 가운데,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도록 행하지 않으시고, 강력한 현상들을 일으키시면서 행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이들이 시각, 청각, 촉각을 통해서 강력하게 느끼고 자각하도록, 성령강림을 의심할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2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라고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기도에 열중하고 있던 120명의 거룩한 성도들의 귓전에 강한 바람소리는 순간 놀라움을 일으켰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이 하늘에서 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불어온 바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임하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왜 하늘로부터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권능이 저들에게 임하였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늘의 영성을 주어 이 땅의 것들과 무관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하늘의 능력으로 변화시키라는 메시지 인 것입니다. 이 땅을 살리고자 하는 새로운 사명이 예수님을 따르는 거룩한 무리들의 몸과 마음과 생각과 삶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믿음의 공동체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성령강림의 현상은 불이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였고, 그 불이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3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바람과 불은 길들일 수 없는 자연의 힘입니다. 바람이 큰 소리를 내며 세차게 집을 훑고 지나가고, 불이 각 사람 위에 머무는 체험은 무서우면서도 짜릿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이와 같은 성령강림의 강력하고도 독특한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작은 그룹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세상이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으로 변화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와 함께 각 사람에게 성령이 불이 혀처럼 갈라져 임하면서 4절을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 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의 자리가 모든 사람의 성령 충만함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집안의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각각 임했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성령 충만함이 경험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두 다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집 안에 있던 자들이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 예수생명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 위해선 120명이 50일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 승천 이후 기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공동체적인 친밀감과 결속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을 통해 강력하고 집중되고 초점 잡힌 기도가 이루어 질 수 있었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공동체로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족적인 친밀감이 넘치는 교회일지라도 성령의 강림을 맛보지 못한다면 그 교회공동체는 기껏해야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집단으로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가장한다고 해도 단순한 친교공동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기에 오늘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있습니다. 성령이 떠나가시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사교집단이고 개인의 이익집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교회를 쥐락펴락하고, 마음대로 자식에게 물려주고, 마음대로 자기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냥 거기에 대충 편승하고 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어 교회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잃어버린 집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방언: 새소식을 위한 새 언어
성령께서 이처럼 강력하게 임하면서 가장 먼저 120명의 사도들과 제자들의 입에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4절 중반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제자들은 고작 아람어에 능통한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성령충만하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개그프로그램에 간혹 나오는 억지 외국어 흉내 내는 것처럼 그냥 의미 없는 주절거림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에 의해 터져 나오는 이 땅의 언어들이였습니다. 11절 하반절에 보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만민을 향해 여러 다른 언어들로 하나님 나라의 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며 성령강림을 통해 제자들에게 나타난 일들 가운데, 방언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이처럼 강조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일이 아닌 언어의 틀을 깨는 방언의 역사를 성령강림을 통해 제일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을까요? 이것은 앞으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전 세계의 언어로 증거 될 세계선교의 시대를 예고하는 예언적인 사건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듣도록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점에서 성령의 은사로서 방언을 주시는 이유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목적에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공표: 성령강림을 세상에 알리시다.
하나님은 오순절 성령강림 초유의 사건을 은밀하게 진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놀라움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현장에 수많은 조연들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5절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저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 남자들은 세계 그 어디에 살든지 일 년에 세 번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50일 후에 준수되는 오순절을 함께 지키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이 순례객들은 제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방언을 하기 시작하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6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순례객들이 모여 가만히 소리를 들어보니 그들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지중해 전역에서 모든 사람이 헬라어를 제2언어로 사용했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의 정복 전쟁 이후로 당시의 헬라어는 오늘날의 영어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들은 소리는 공용어였던 헬라어도, 유대의 모국어인 아람어도 아니었습니다. 120명의 거룩한 주의 백성들은 세계 각국의 고유한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으니, 예루살렘의 방문자들은 제자들이 아람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웠던 것입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의 추종자임을 알아차렸습니다. 7-8절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아마도 그 당시 소문이 나지 않았을까요? 갈릴리에서 온 예수의 추종자들이 모여 있다는 소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갈릴리 지방은 교육환경이 열악한 지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런 하찮은 갈릴리 사람들이 우리들 나라의 고유한 언어를 배워서 말하는 걸까?’라는 의미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한편으로 의심하면서도 한편으로 신기해했던 것입니다.
세계선교: 만국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9절부터 11절까지는 제자들을 통해 나온 언어들의 나라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9절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절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절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왜 이렇게 많은 나라가 언급되었을까요? 여기에 언급된 나라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유대인들이 속했던 국가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젠 이 나라들을 향하여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구원사건임과 동시에 세계만민의 구원 사건의 징조가 되는 사건입니다.
이제 성령충만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처럼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방언소통사건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성육신적 선교의 방향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언어로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듯이 제자들은 각 나라 언어들을 배우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 지역적,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넘어 선교지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그곳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그 점에서 방언소통사건은 하나의 세계 언어를 엄청나게 많은 열방과 족속들의 언어로 분화시키셨던 바벨탑의 저주를 푸신 사건입니다.
새 술에 취하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세계만국의 언어들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를 증거하는 120명의 제자들의 성령충만한 모습을 보면서 무리들은 당황하고 놀라워하면서도 완악한 유대인들은 이를 술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12절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절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이것은 성령의 권능이 제자들을 황홀경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단지 새로운 술에 취했다고 평가절하했지만 120명의 제자들은 성령에 취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술에 취하면 인생을 망치는 길이 되지만 성령에 취하면 그의 삶이 성령에 이끌리어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이기심과 탐욕, 자기주장과 의지, 교만, 절망과 자포자기의 자기경멸에 빠진 육의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령에 취하면 제정신을 잃고 예수님의 정신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새로운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옛사람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위 세상의 상식이 아닌 그 상식을 깨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정신”의 본질은 이기심, 탐욕, 교만, 음란, 자기경멸, 열등감, 과도한 경쟁심, 시기심, 질투 등입니다. 그 점에서 제정신은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까지 절망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그래서 제정신이 들어오면 지금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후회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돈과 시간을 교회에 갖다 바치지? 내가 왜 이렇게 여기에 그것도 지하 개척교회에 우중충하게 앉아 있는 거지? 가봐야 할 좋은 곳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써야 할 일도 많은데 왜 굳이 주일마다 예배드려야 하지?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리고 주일헌금을 드려야 하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취하면 자기가 손해 보는 것도 모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계속 봉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예수님 믿으면 사람들의 상식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선물은 이 땅에 남겨두고 간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 승천의 직접적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로서, 예수님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존재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그 분의 능력과 에너지를 성령을 통해 부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제자들이 새로운 체질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깨우치고, 세상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여러분의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우리 예수생명교회의 성령강림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믿음의 사람들로 탈바꿈하는 거룩한 변화가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통해 복음이 흘러가 수많은 생명을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끌어가는 구원의 역사가 폭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가 멋지게 출발할 수 있도록 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예수생명교회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경험하면서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나갔던 것처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쓰임받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게 하소서.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 일어나게 하시고, 세상이 아닌 성령에 취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를 거룩한 산제물로 드릴 수 있는 제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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