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6일 주일예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마 11:28-30]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하신 일은 안식이었습니다.
창 1: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 1: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그리고 바로 그 안식의 자리로 인간을 초청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타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 안에서 누리는 안식의 삶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가야 하는 삶으로의 추락이었습니다. 그런 인간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있기를 거부하고 바벨탑을 쌓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높이 알리려는 마음과 흩어짐을 면하자는 자기 안위로 시작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 안에서 은혜롭게 살아가던 방식이 아닌 자기가 높아지려는, 자기의 유한한 자원을 늘려가려는 그래서 자기가 좀 더 많아지려고 하다 보면 무한 경쟁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게 지나쳐 약탈 전쟁도 서슴지 않습니다. 여기에 긴장과 걱정, 염려, 두려움, 고통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자기가 도태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어찌 되겠습니까? 불철주야 일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칠 수밖에요. 삶에 짐이 버겁기만 합니다.
2022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우리나라의 삶의 만족도, 삶의 질의 수치는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권입니다. 10점 만점에 5.9점으로 38개국 가운데 36위입니다. 사람들이 지치고 상한 겁니다. 마지못해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러니 거기에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 오늘도 세상으로 그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그럼 그 결과가 달라지겠습니까? 그러니 더 답답하고 우울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지쳐 있고 힘들어하면서도 이 길을 계속 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름 똑똑하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이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개인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넘어서는 것이 자신의 우월함을 들어낸다고 여기기 때문인가요? 실패하면 무능하다고 평가받을까 두려워서 죽어도 끝까지 자기 능력으로 해보겠다는 심산일까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신념을 품고 있는 한 이 삶의 테두리에서 우리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 삶은 또 다른 족쇄가 되고 버거운 짐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속아 기만당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한계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5:5b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참으로 상반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려고 하면 먼저 하나님에 대한 앎의 질량이 늘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앎이 증대되는 것도 내가 찾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이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복음은 인간의 교훈이 아닙니다.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은혜를 입은 자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출발해야 하고, 우리의 전제를 바꾸어야 합니다. 패러다임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거듭남에서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거듭날 때 우리는 드디어 주님 십자가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런 과정을 스킵하고 그냥 들이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고 보고 계십니다. 그들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보시면서 마음이 슬프셨던 거죠. 그래서 그들을 부르시는 겁니다. 쉼의 자리로 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예수님께로 나가면 예수님은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곳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그와 같은 처지를 인정하고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쉬울까요?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쉬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름 자존심이 강한 이들은 절대로 다른 이들에게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정을 받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마음의 옹벽이 없어야 볼 수 있는데,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근심하시겠습니까?
더 깊이 들어가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수고와 무거운 짐을 넘어 온 인류가 지고 있는 죄의 버거운 짐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고 인정하지 않는 한 자기는 그 어떤 수고도, 무거운 짐도 지고 있지 않으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실 때 응답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찌 쉼을 얻을 수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쉬게 하신다는 것은 마지막 날의 영원한 안식뿐만 아니라 일상에서의 모든 갈등을 해소한 후의 평화와 안식까지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수고와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주님께로 가면 우리는 죄에서의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의 해방,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이 그 일을 이루어주실 수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분명하게 차별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예속되어있는 한 사람들은 쉼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고압적이었습니다. 행하지 않으면 바로 정죄가 들어왔습니다. 점점 더 무거운 짐만 그들의 삶에 놓여졌던 겁니다. 저들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끊임없이 얹었습니다.
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마 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런 그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자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배하고 억누르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는 말씀인 거죠.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그 당시 랍비, 교사들과는 다르게 마음이 온유한 자요 겸손한 자로 자신을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나 다른 예언자들은 종말에 임할 메시아를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그리고 있어요. 이런 그림을 그려 보이시면서 예수님은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지배하려 하지 않고 섬기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노력을 더 해보라는 어떤 무리한 요구를 던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이 선물을 얻기 위해 우리는 그간에 메고 있던 다른 멍에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멍에란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지워질 수 없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라는 표현은 유대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 관계를 가리킬 때 관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은유를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우는 걸까요? 예수님이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을 ‘모방하라’ ‘자기의 경험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더 많은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지워주는 짐과 비교할 수 없는 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쉼을 얻을 수 있어요.
배움의 내용이 다릅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복음의 진리를 와서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안식이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예수님께서 나와 내 죄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을 알고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고 진리를 찾아감으로써 우리에게는 참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얻으리니’라는 말은 ‘찾다,’ ‘발견하다’라는 뜻입니다. 참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 있었고, 또 그분이 주리라 약속한 것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지어주시려고 하는 멍에와 짐이 가볍기 때문입니다.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그 짐이 가볍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게 하신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요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이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가벼워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숭고하며 엄정합니다. 그런데도 가볍다는 것은 우리만 메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랑으로 메어주시기 때문에 가볍고 또 영생을 동반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앞을 가름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곧 종말이 다가올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람들의 삶 또한 팍팍해지고 있습니다. 각자가 살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그 길은 쉼과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것 뿐입니다.
이렇게 숱하게 반복되고 있는 틀을 깹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다가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것입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이어야만이 이 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예수님을 떠나 안식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주님께 매일 매일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우리 혼자 메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감당하는 몫이 더 큽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지치고 상하여 시몬이 십자가를 함께 지고 올라갔지만, 이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멍에를 영원토록 지고 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멍에를 메는 것이 은혜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참 진리가 우리 안에 빛을 비출 때 우리의 허망한 마음은 이 빛의 비춤 가운데 새로운 안식이 찾아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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