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5일 주일예배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 마 12장 1-1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그토록 많은 사람이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인물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외면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들이 그분을· 배척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배척까지는 아니라 해도 심각한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의 기대가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움과 기대 상실은 우리의 태도를 결정짓는 데 치명적인 조합입니다.
다른 곳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비난했던 고라신 같은 곳은 그곳 회당의 현무암 폐허에서 ‘태양의 구원’이라는 의미인 바스(the bas) 신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예수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예수님을 배척하거나 외면했습니다. 마 11:16-19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무책임하고 충동적으로 별나게 노는 어린아이들과 같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결코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군중들 속에서 외칠 수 있었던 거죠.
그러나 예수님을 가장 심각하게 반대한 이들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을까요? 그들은 나름 유대 종교 사회에서는 선한 사람들이었고,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수호자였습니다. 그렇게 율법에 박식했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따라야 했는데, 오히려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왜 그들은 그토록 예수님을 반대했던 걸까요?
「기독교 초기의 유대교」(Judaism in the Beginning of Christianity)라는 책을 쓴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는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바리새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제의적인 율법의 세부 사항들을 강조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서 어떻게 하면 그 규례를 잘 지킬 수 있을까 해서 그것을 위한 세부 사항을 만드는 일에 대단히 열정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의 길을 질주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접점을 찾을 수 없으니 강하게 반대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안식일 규정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기뻐하는 일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들은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각종 규제 사항들을 쏟아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들의 조항을 어긴 것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팠는지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일상적인 행동이지만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례를 정확히 어기고 만 겁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즉각 바리새인들이 비난합니다.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물론 이삭을 잘라 먹는 일은 허용된 행위였습니다. 그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신 23: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문제는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그들이 정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몇 가지 범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눈으로 볼 때 이삭을 따 비빈 것은 곡식을 수확하고, 손을 비벼 키질하고, 식사를 준비한 행동이에요. 그러니 딱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금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기 열심으로 이런 짓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죠. 그러나 이것이 유대인들만의 문제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자유로울까요? 교회 안에서도 지금까지 많은 율법주의자들이 범해왔던 오류가 이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데 지기에 버거운 많은 짐을 사람들에게 올려놓습니다.
성경에서의 안식일은 속박이 아니라 예배와 휴식을 위한 날입니다. 엄밀히 말해 제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바리새인들의 규례를 어겼고, 바리새인들에게 그것은 거의 최악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행동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들에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구약에 있는 두 가지 이야기로 응수하셨습니다. 하나는 다윗의 이야기였습니다.
마 12: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윗이 성막에 들어가서 ‘진설병, 즉 하나님께 감사제로 드려져 성소에 놓여 있는 열두 덩이 떡을 먹었던 상황을 회상시키셨습니다. 제사장 외에 먹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필요가 의례 보다 우선시되었다는 것을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말씀해주신 겁니다. 바리새인들도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진설병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걸 말씀하시면서 인간의 곤궁이 율법보다 앞선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중요한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제사장들의 예를 들으셨습니다.
마 12:5-6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엄격히 법적으로 볼 때 제사장들은 안식일 법을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도 일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종사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관한 보통 규정들에는 제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성전 예배가 안식일에 관한 규칙보다 우선시 되었던 겁니다.
안식일에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당연히 일해야 하는 제사장들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는니라.”
뜬금없이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앞에 두 이야기와 이 말씀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훨씬 더 뛰어나게 하나님의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엄격한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에 우선권을 양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은 인간의 곤궁을 고려하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곤궁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바리새인들이 호세아의 의미를 이해했다면 그들은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이 무죄한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안식일에 행한 행동에 있어 무죄한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엄격히 법적으로 해석할 때는 계명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예배 아니겠어요.
하나님은 예배나 제사의 의례적인 정확성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 깊은 충성심을 더욱 찾으십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의례적 준수를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 반대하신 거죠. 하나님은 긍휼을 의식보다 앞세우는 분이시고, 예수님은 안식일의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실 수 있는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을 겁니다. 속으론 부글부글했겠지요?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떠나신 예수님은 한 회당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무리 가운데 어떤 이들이 예수님에게서 꼬투리를 잡아내려고 질문을 던집니다. 배척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 12: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마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마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바리새인의 규례가 얼마나 가식적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을 때는 끌어내면서, 사람을 고치는 일에 있어서 안식을 범한다고 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짓 아니겠습니까?
대꾸도 못하는 이들 앞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 하셨고, 그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마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실 때, 사실상 안식일 율법을 어기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규칙을 어기신 것이었습니다. 미쉬나 소책자인 요마 (Yoma) 8:6은 안식일에 의학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를 사람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그런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굳이 안식일이 아닌 다음 날 고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적이고 영적인 행동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구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를 구해 내는 것은 허용하면서도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너무나도 안식일을 귀하게 여겨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예수님은 선을 행하실 작정이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율법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율법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시는 겁니다. 사랑의 기준이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임을 표명하셨던 겁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의 정신은 영적인 삶보다 관습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런 행태는 종종 교회 내의 율법주의자들 사이에서 발견되곤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의식 준수에 소망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무지함과 폭력성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시려는 예수님 앞에서 폭발하고 맙니다. 저들은 점점 더 대응 방식이 난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였던 겁니다. 십자가가 가까이 왔습니다.
마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며,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따르고 있다고 했지만,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곡해했습니다. 안식일에 쉼과 기쁨을 누려야 할 이들에게 엄청난 짐을 지워주었습니다. 게다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안식일의 온전한 정신이 무엇인지를 말씀해주셨을 때 겸허하게 수용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오히려 죽이려 의논하였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현대의 바리새인들 역시 가장 경건하다고 스스로 자부하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는 달리 가고 있기에 오히려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받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들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행위의 법전으로 석화된 종교적 금지들은 종종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목적들을 거스릅니다. 율법의 문자에 대한 강요가 참된 인간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로 인하여 사랑의 표현을 방해할 때 이 문제는 특별히 중대해집니다. 바리새인들의 제도와 같이 계명 중심의 제도는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반드시 이런 과오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전보다 크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 나라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그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른 부수적인 것만을 보게 되는 거죠. 우리는 복음이신 예수님께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권적인 주님이십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해 가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이죠. 그것을 읽어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고 참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는 어리석은 바리새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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