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5일 주일설교동영상
[여전히 외인이십니까? 엡 2장 1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2월 7일 하와이주 오하우섬 진주만에 주둔 중이던 미 태평양함대를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기습으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해군함정 12척이 파괴 혹은 침몰하고, 항공기 188기가 파괴되었습니다. 인명피해는 민간인 68명, 군인 2,335명이 사망했습니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서 애꿎은 피해자들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계 이민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미국 내에서 잘살고 있었는데, 전쟁이 확산하면서 잠재적인 적으로 몰리게 되었던 겁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큰 반감을 사게 되었던 거죠. 미국 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 수용소를 만들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인들을 강제수용시켰습니다. 12만 명의 재미 일본인들이 미국 전역에 약 10곳의 격리캠프에 수용되었습니다. 재미 일본인들은 오로지 일본계라는 이유만으로 근 3년을 철조망 울타리 안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재미 일본인들 가운데 특히 2, 3세대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자요 영주권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에게 외인 취급을 받았던 겁니다. 그 당시 존 드윗 미 서부 사령관이 1942년 서부 일본인들의 강제 이주 조치와 관련한 최종 보고서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2, 3세대 일본계 미국인들은 '미국화(Americanized)'됐지만 그들의 인종 습성은 희석되지 않았다”며 “일본인들은 인종 자체가 적(The Japanese race is an enemy race)”이라고 했습니다. 재미 일본인을 향한 당시 미국인들의 시각이었던 거죠.
심지어 일본계 청년 중에는 미군에 입대해 일본과 싸우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태어나 자라고 학교에 다녔고, 미국이 자신의 조국이라고 믿었는데 거부를 당하고 외인 취급당하는 참담함을 겪었던 겁니다. 조국이라고 여겼던 곳에서 그 나라 시민으로 살지 못하고 소외를 당한 것입니다.
누구를 외인이라고 합니까? 외인은 어떤 사람들 속에서 소외당함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가족이 아니라 소위 나그네 취급을 당하는 자입니다. 어떤 사회의 주변에 거주하고 있으나 그 안에 함께 어우러져 살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한 나라뿐만 아니라 가정도 그렇습니다. 수년 동안 한 가정에 살아서 거의 그 가정의 일원이 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 가정에 엄밀한 의미에서 가족은 아닙니다. 가족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느 한 부류에 속해 있는 사람이면서 실제로 거기에 속해 있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소외에 직면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 그에 따른 상처가 매우 클 수밖에 없는 거죠.
교회 공동체는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요, 형제자매인데 공동체 속에서 소외당함을 느끼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동체의 문제로 야기되는 것들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도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에 대한 구제에서 헬라파 과부들이 집단적으로 소외되는 일이 벌어지죠. 그로 인해 헬라파 유대인들이 원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공동체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소외가 교회내에서 끊이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문제에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연합되지 못하고 계속 겉도는 것입니다. 스스로 외인되고 나그네 되기를 편하게 여깁니다. 깊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의 구원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이 일을 풀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역사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고 믿고 그것을 살아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을 확신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겁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서기 전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철저한 외인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엡 2장 12절에서 그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둘을 갈라놓았던 막힌 담을 허무시고 평안을 전하심으로써 멀리 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에게 가까워지게 하셨습니다. 엄밀히 말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들어 새로운 약속 공동체인 교회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렇게 주님께서 계명의 율법을 폐하시고 막힌 담을 허심으로써 이루어진 결과를 선포합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더는 법적 권리가 없는 외국인이 아닙니다. 신분이 극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했던, 그래서 유업이 없던 자들이었는데 지금은 그곳에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심을 통해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법적으로 시민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시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의미하는 특권들과 그에 따른 책임이 부여되고, 법적인 보호를 받습니다. 국가는 시민을 지키고 방벽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또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시민 이상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법적 장치를 넘어 혈연, 피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죠. 인종적 장벽, 유대인과 이방인, 헬라인과 야만인을 넘어서서 형제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 명의 아이를 입양한 외국의 가정들 속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들을 입양하기로 결정 한 부모에 의해서 하나의 가족의 된 것입니다. 가족처럼 여겨지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 가정의 법적인 자녀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 삼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과 가족이 되었습니다.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형제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애정과 보살핌과 후원을 해주는 친밀한 관계를 표현합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라고 이야기한 것은 현재 그들이 어떤 지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자 하는 목적에서입니다. 우리가 현재 어떤 지위에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확신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지위가 가진 특권들을 숙고해 나가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포지션을 정확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참으로 거기에 속하여 있는 자인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해당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희미하거나 불분명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피상적인 행동이나 행실의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매우 희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외모로 어떻게 보이고 행실이 어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안과 밖의 위치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이와 같은 성령의 인치심, 이것이 절대적인 증표입니다. 엡 1:14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은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확증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전히 교회 안에 있었고 그리스도인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 없이 그저 열심히 예배도 드리고 성경공부도 하고, 성도의 교제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일상의 시간에서는 다 똑같아 보일 수 있어요. 그 진면목이 일상에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계기를 통해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위기와 시험을 통해 지금까지는 자신의 의지로 버텨왔던 것들의 한계를 드러낼 수도 있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간의 위선과 허영심을 분명히 드러나게 하실 때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치심, 나의 영적 동기, 약속의 확인과 부르심의 소명이 늘 점검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남들처럼 했던 종교적 행동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의미 없는 열심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목적이 아니라 자기만족과 자기 위안을 위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정확히 판단해내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22절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외면적으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의 행한 일들을 보면 주님이 드러난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할 어떤 자격도 없었습니다. 즉시 그들을 추방하십니다. 23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주께서 말씀하실 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하셨어요. 안타깝게도 눈에 보이는 외적인 교회의 성원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리스도에 대해서 몰랐던 겁니다. 무지했던 거죠. 예수님에 대해서 진실되고 생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 늘 있어 왔어요.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자라왔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외인이었던 겁니다.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이 일어나지 못하는 한 겉돌 수밖에 없습니다. 외형은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내적인 연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한 결말은 영원한 소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외인입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재미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의 혐오감과 적대감으로 억울하게 외인 취급 받았지만,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에서는 외인 됨이 분명하게 드러나 그 나라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가리어졌던 거짓된 실체가 폭로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외인이십니까? “아니에요. 나는 하나님 나라 시민입니다”라고 확신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안에서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가족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더는 외인이요 나그네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워가십시오.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출생증을 부여받았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왕이시오,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벽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세워 주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리소스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늘 아버지의 소유이기 때문이죠.
또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으로써 요구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되고 가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다른 모든 나라에 대하여 우리는 외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외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세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과 너무 친한 척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경건치 않은 사람들 가운데 나그네요 외인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적대적일 수 있고 우리를 핍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위축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행하는 대행자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아들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딸로 살아가도록 하늘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자리로 우리를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연합되어 있지 못하고 외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마음을 향하여 바울은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심으로써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 나라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우리 삶을 세워주십니다. 강력하게 지켜주십니다. 샬롬을 이루어주십니다. 그 은혜 가운데 우리는 서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아들로서 딸로서 누리며 삽시다.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맙시다. 외인되지 맙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날마다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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