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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화평하십니까? 에베소서 2장 14-18절

by 최수근 2020. 10. 19.

2020년 10월 18일 주일예배

[화평하십니까? 에베소서 2장 14-1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를 아실 겁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PTSD는 공포와 스트레스를 자극하는 사건을 겪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고 해요. 그점에서 코로나 19PTSD의 발병요인이 될 수 있을까요? 중국과 홍콩 연구진이 각각 실행했던 연구에 의하면 과거 사스 때 보다 코로나 19를 겪은 환자들 사이에서 PTSD의 유병률이 높다고 하였습니다. 

코로나19를 겪은 환자의 PTSD 유병률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들었습니다. 코로나19의 부정적인 뉴스 보도와 사회적 적대감이 PTSD 증상의 발현을 촉진 시켰다는 겁니다. 연이어 방송되는 부정적인 내용의 뉴스 보도가 이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고, 다방 면에서 나타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적대감은 코로나19를 겪은 이들에게 비수를 꽂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시사프로에서 코로나 완치 이후 몸소 느끼는 주변의 적대감으로 인해 힘들어하며 인터뷰 도중 눈물 흘리던 한 부부를 생각해보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처음에 확진자 동선을 공개했을 때 그런 사회적 적대감 앞에서 실은 많은 피해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짠하다가도, 저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에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마스크 안 쓴 사람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적대시하는 감정이 올라와서입니다. 

코로나를 떠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갈등이 발생할 수 있어요. 그럴 때 대화로 혹은 자신이 참음으로써 문제를 넘어가기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겁니다. 지금 거의 예외 없이 어느 자리에나 적대심, 적개심으로 충만합니다. 인종과 계층간의 갈등, 이념과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이데올로기 갈등, 종교 갈등, 노사 갈등, 노노 갈등, 상대 집단을 향한 갈등이 분기탱천하는 분노 수준을 넘어 일촉즉발의 증오 수준으로 심화 되고 있는 듯합니다. 개인과 함께 사회적인 집단으로서의 PTSD도 심각하게 대응해야 알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위기 앞에선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개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로 들어가 어떻게 위로자가 되어야 할지를 깊이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위로자로서의 위치를 교회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사회에 스트레스를 주는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예배와 관련되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회도 국가와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겁니다. 한국교회가 코로나를 빌미로 좌파 정부에게 핍박받고 있다는 프레임으로 지금의 사태를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위기와 무관하게 우리 예배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확고부동함이 코로나 팬데믹을 접하면서 첫 단추를 잘못 끼게 만든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지켜내기 위해 계속 싸운다면 교회는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 위치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에 맞서 참 안식일을 지킴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일상의 흘러가는 시간, 크로노스에 대한 경험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위해 아픔의 현장을 외면할 때 주님은 그 현장을 비켜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그런 주님을 적대시할 때 그들에게 진정한 안식일은 없었던 것이죠. 오늘 우리의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배가 침해를 받는다는 마음보다는 고통의 현장 속에 샬롬을 전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고통을 분담한다면 우리의 시간에 아주 특별하고도 두껍게 임하시는 카이로스, 즉 하나님 은혜의 시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삶에서 경험되는 온전한 예배 아닐까요? 

우리 주님은 생각과 방향이 다르다고 해서 적대감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124절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화평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진저라고 바리새인들을 향해 외치셨지만, 그 분노는 그들 죄에 대한 단호함이셨지, 거기에 그 어떤 적대감도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갈라졌던 둘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여전히 적대감과 적의를 갖고 있다는 것은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적대감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습니까? 결코 가까워 질 수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중간에 현실적으로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실제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담입니다. 그것은 둘로 하여금 원수 되게 하는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이 더이상 작동하지 못하도록 자기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그로 인해 막힌 담을 허시고 가까워지게 하신거죠. 

그와 함께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멸시하게 만들고, 두 집단을 갈라놓도록 만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2: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로부터 자기들을 거룩하게 구별 지으려 했던 의식법, 절기와 결례법을 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식법 규정 및 도덕법의 정죄를 둘 다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둘 다 분열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이 둘을 폐하셨습니다. 

이 일이 처음부터 작용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둘을 십자가로 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예루살렘 교회는 주께서 허무신 중간의 담과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전해졌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여전히 적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면 주님이 허무신 것을 드디어 인정하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수용함으로써 엡 2:14-15절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허무신 것들과는 달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하나님의 계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극복했던 것을 우리가 다시 장벽으로 세움으로써 그 옛날 유대인이 범했던 죄악의 자리로 돌아가곤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닌 다른 규범 등을 통해 자기들을 특별하게 구별하고 그 기준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정죄합니다. 거기에서 종교적인 적대감이 나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선민이라고 하는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적대감으로 이방인을 멸시한 것처럼 한국교회가 극복하지 못하는 영역도, 바로 이 영역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막힌 담을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심으로써 이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율법은 둘 사이를 나누는 담이었지만 믿음은 이 둘을 연합시켜 줍니다. 이를 통해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편견과 적대감을 버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에 이것은 가능했습니다. 유대인이 하나님께 가까워졌고, 가까워진 유대인이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이 믿어 하나가 되고 그가 또 다른 생명을 주께로 이끌어가는 생명의 순환은 유대인이 이방인에 대해 품었던 바로 그 마음을 갖고 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런 교만함을 갖도록 하였던 것을 다 폐하심으로써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둘로 한 새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새로운 생명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이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사라지고 샬롬이 자리잡은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만의 화평으로는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원수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는 죄의 권세 아래서 하나님과 원수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샬롬이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깅 예수님은 그 원수된 것,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심으로써 소멸하셨습니다. 상실되었던 샬롬을 회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오심은 평안의 도래인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자리로 회복된다는 선포입니다.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님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 인간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내려놓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분의 말씀하심 앞에 진정 서 있다면 더 이상의 적대감을 품기보다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원수처럼 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되게 하신 것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 그 분을 예배하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지금과는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는 새로운 인류로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다음 주 19-22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인할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육체를 통해 허무신 것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목적을 참으로 오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오셔서 샬롬을 전하여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인에게로 그리스도의 샬롬이 전하여졌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을 대행하여 평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내 안에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의 온전한 실천을 위해 우리 안에서 더욱 가까워지는 성도의 교제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목과 적대시하는 감정은 물러가고 샬롬의 아름다움이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에서 실천될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샬롬이 하나님과 멀리 있는 자들에게로 흘러갈 수 있고, 그들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이 이루어지는 부르심의 목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이 자리 샬롬의 자리가 이루어지는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넘어서 가인과 아벨의 분열, 그 적대감으로 동생을 쳐죽였던 비극이 회복되고 진정 샬롬이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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