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설교동영상

영적 소외: 에베소서 2장 11-13절

by 최수근 2020. 10. 11.

2020년 10월 11일 주일예배

[영적 소외: 에베소서 2장 11-1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상 초유의 코로나19 상황이 지속되면서 소외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언텍트 시대에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이 늘어나면서입니다. 소외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소외란 어떤 무리에서 기피 하여 따돌리거나 멀리함이라 하였고, 또 다른 의미를 보면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게 된 인간의 소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소외나 정치적 소외와는 다른, 훨씬 더 철저한 소외입니다. 헌데 이 소외는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본래 아름답게 창조되어 하나님과 교제하였던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같은 피조물 사이에 소외가 일어났습니다. 인간관계를 붕괴시키는 것보다 사람을 더 비인간화하는 것은 없습니다. 관계의 소외로 인해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며,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중의 소외를 화목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땅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셔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세상은 가공할 만한 상실 상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하나는 종족 간의 소외였습니다.

211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할례를 받았지만,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하등의 관계를 하지 않기 위해 유대 민족을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계에 말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오해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와 무할례로 이방인들을 구별하여 차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차이점을 하나의 장벽으로 돌려버렸습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높이고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의 후손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 것이죠. 

비극은 이스라엘이 그런 자신의 소명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특권을 편애로 왜곡시켰고, 나아가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마음속 깊이 멸시하고 심지어 혐오한 데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처럼 헬라인들도 헬라 이외에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2000년 전 미개했던 사회의 문제라고 보지 않습니다. 문명화되고, 인권이 사회의 중요한 잇슈로 자리 잡고 있는 오늘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밖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소외시키고, 소외당하곤 합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분열의 담을 쌓고 있습니다. 인종, 피부색, 계급, 부족, 계층의 장벽을 세웁니다. 코로나 19의 위협 앞에서도 세상은 하나 되기보다는 분열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난무하는 분열성은 그리스도 없는 모든 공동체의 지속적인 특성입니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소외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문제는 교회 공동체 안에도 이런 분열의 위험성을 늘 안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탄이 분열을 책동하는 존재이어서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포스트 크리스텐덤 시대에 교회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소외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있습니다. 마치 소명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자기 본질을 상실하고 비인간화하는 것처럼 신앙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신앙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영적 소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세상은 영적 소외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건 유대인도, 이방인도 동일한 문제였습니다.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언약으로부터, 소망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멀리 있었습니다” 13a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와 같았던 과거 자신들의 상태를 직시하여 그것들을 생각하고 상실의 상태가 어떠했었는지를 기억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하여 기억하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회복하시기 이전에 우리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문제에 정직하게 직면할 수 있을 때 하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소외 상태를 생각하고, 기억하고 그들의 관한 진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달을 때만,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진정으로 이해되어 알 수 있고,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라 기억하라 하여도 인간은 당장 코앞에 닥쳐있는 문제 때문에, 그로 인해 바쁘다는 핑계 때문에, 근본적인 영역들을 외면하곤 합니다. 우리의 문제에 직면하여 우리 자신을 바라볼 틈도 없이 자신의 왜곡된 감정에 치우쳐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께 가까워지기보다는 점점 더 깊은 소외의 자리로 떨어져 가고 말 것입니다. 

죄로 죽었던 자신 앞에 스스로 직면하여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런 자신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건져 주신 은혜의 깊이를 오늘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다중의 소외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본래 우리 모습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12절에 말씀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기 전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범주 밖에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밖에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구원의 은혜도 누릴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하신 약속 밖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언약이 없으니 소망도 없습니다. 소망이 사라질 때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떠난 모든 종교들은 근본적으로 비관적입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오직 유일한 이론은 잠간 동안 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떠한 소망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저 세상에서도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 소망이 없는 것이죠. 

더욱 더 나쁜 것은 하나님 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서운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들 또한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에 휘둘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죄로 인해 발생한 난공불락의 장애입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극복했던 이런 장애들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인식하기까지는 하나님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식하지 못하니 감사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고 헌신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가장 멀리 있던 자들이, 그래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던 자들이 가까워졌습니다.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까워지는 것이고 그 언약 안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것은 본질적으로 이것입니다. “한때 멀리 있던 너희가 가까워졌느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오직 유일한 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13절에서 지적하는 길입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의 모든 복락들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에베소서 13절에서 약속하신 복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의 화목하게 하시는 십자가로 인해 우리를 소외의 자리로 몰고 갈 세력은 힘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하였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는 극복되었습니다. 우리는 복된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지금 이 권리를 누리고 있습니까?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확신과 신뢰로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깥 쪽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소외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졌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더이상 자기 자신을 은총의 자리로부터 소외시키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거하십시오. 

거기에서 충만하여 나가십시오. 저세상으로 나아가 소외된 저들을 품는 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