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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포이에마 크리스챤:에베소서 2장 8-10절

by 최수근 2020. 10. 4.

2020년 10월 4일 주일예배

[포이에마 크리스챤: 에베소서 2장 8-1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인간은 겸손보다는 자랑, 나아가 태생적으로 교만함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면 대부분 자랑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랑, 자식 자랑, 돈 자랑, 온갖 자랑거리들을 쏟아냅니다. 그러다 보니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자랑합니다.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서도 비슷합니다. 믿음이 행위로 확장되면서 그것이 은연중에 자랑거리가 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곤 합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초대교회 안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이 문제 앞에서 바울은 구원에 있어서 매우 철저하게 인간의 자랑하고픈 마음을 부정합니다. 이 논제를 위해 바울은 하나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였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구원을 위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지점에서 잘못 출발하여 사람들은 늘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행위는 아무런 역할이 없음에도 자기 몫을 주장하는 거죠. 하지만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몫은 제로입니다. 실질적으론 마이너스입니다. 죽었던 자인데 산 자가 된다는 것은 기적이죠. 그 기적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을 향해 선포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8절 말씀 속에는 기독교의 복된 소식의 근본이 되는 세 단어 구원, 은혜,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잘 보십시요. 이것들은 인간 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음과 종노릇과 정죄로부터 해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으로의 총체적인 전환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고, 높임을 받고, 하늘에 앉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은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과분한 자비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과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겸손한 신뢰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스스로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행위를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하는 것으로 구원이 인간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나의 선택, 나의 결정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터치하면서부터입니다. 구원을 하나님과 우리간의 일종의 거래로,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은혜를 제공하시고 우리는 믿음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이 긍정적인 진술을 역설하기 위해 바울은 이것과 균형을 이루는 두 가지 부정적인 진술을 덧붙입니다. 하나는 8b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에서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걸까요? 헬라어 원문에서 이것’(touto)은 중성 명사입니다. 반면에 믿음은 여성 명사입니다. 그 점에서 이것이라는 말은 믿음보다는 앞 문장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는데 이 전체 사건과 경험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다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업적도 아니고, 인간이 행한 어떤 종교적 행동이나 자선 행위에 대한 보상도 아닙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는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구원하셨으니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감격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삶은 그리스도의 공적과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는 소리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비교할 수 없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긍휼, 자비에 대한 감사요 찬양입니다. 거기에 자기 과시가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종종 신앙 간증을 할 때에 자기 과시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초점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닌 자기에게 맞추어져서입니다. 

회심하기 이전 다소 사람 사울은 자기 확신에 넘치는 이였습니다. 빌립보서 34절 이하를 보면 모든 방면에서 자신을 자랑하였습니다. 자기가 이스라엘 중에서 태어난 특별한 그 지파를 자랑했습니다. 바리새인임을 자랑하였고, 그의 종교성, 도덕성,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였습니다. 우리가 자랑하기 가장 쉬운 것은 언제나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행동에 목숨 거는 사람일수록 이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철저하게 행동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말 만하지 않고 실제로 행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행위는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그래서 거룩합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기에 충분한 자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사람입니다라는 것에 사용됩니다. 마귀가 우리를 가장 교활한 방식으로 시험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자기자랑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인간은 구원에 있어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3:27에선 보다 명백하게 진술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의 선한 삶, 선한 행실, 우리의 종교적인 규율을 지키는 것, 우리가 예배에 참여하는 것 등, 우리의 종교적인 활동들이 우리로 그리스도인되게 한다는 생각들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 즉 믿음의 행위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구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이루신 역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시점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마치 자기의 특별한 믿음과 헌신과 섬김으로 되어진 것처럼 가로채곤 합니다. 믿음을 행위로 돌려 버리는 것입니다. 이 포인트가 중요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여드리며 주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 보다 성숙한 믿음의 영역에 서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누리게 될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차 세상에 수없이 널려 있는 종교인처럼 전락하여 스스로의 구도의 길을 가고자 할지가 결정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 행하신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하여 일어나는 치명적인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그 능력을 알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구원을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종노릇에서의 해방, 정죄로부터의 구조라는 견지에 말했습니다. 그리고 각각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인간이 구원에 대해 자랑할 수 없음을 증거하는 핵심적인 말씀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도 헌신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에 하나님이 오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입니다. 포이에마 크리스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받은 새로운 사람입니다. 무언가 개선된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은 재창조, 새로운 창조의 역사입니다. 창조는 창조주가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창조는 인간의 모든 것을 차단하는 영역입니다. 인간으로하여금 자랑할 수 없게 만드는 곳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창조하다라는 말은 공로가 있다고 자랑하며 떠드는 입을 막고 물리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까?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드셨는데, 그 지으심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선행, 영원한 과거에 하나님이 계획하셨으며 그것을 위해 우리를 지으신, 그래서 우리가 계속해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신 그 선행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 바울은 어떤 의미로 말하고 있는 걸까요?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선한 일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행하는 소소한 선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롭게 창조되지 않은 일반 사람들도 행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이전 보다 착하게 살라는 것이 부르심의 목적이 아닌거에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본을 따라서 새롭게 지으신 사람입니다. 8:29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저 몇 조각의 선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우월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거룩, 진리의 거룩함, 전적이고 절대적인 의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지으신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곳에 오셔서 행했던 방식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속에서 일하기 시작하셨을 때,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길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의 증거는 행위입니다. 구원받은 이에게서 자연스럽게 열리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문은 열어주셨으니 두렵고 떨림으로 그 거룩함의 길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하등의 가치가 없습니다. 끝내 부도수표일테니까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지 계시지 않는지를 테스트하는 최종적인 시금석은 우리가 더욱더 그리스도을 닮아가고 싶어 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과 죄로부터 거룩해지고 깨끗해지며 구별되기를 바라고 우리 속에 그렇게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거룩함의 갈망이 있느냐없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목적입니다.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처럼 이 단락은 나약한 인간의 행함으로 시작해서 새로운 피조물의 행함으로 끝납니다. 전에 우리는 마귀가 우리를 빠뜨려 놓은 허물과 죄속에서 행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가 행하도록 계획해 놓으신 선한 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일”“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일가운데 행합니다. 완벽한 전환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생활 방식, 악하고 선한 방식 간의,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두 주인, 마귀와 하나님 간의 대조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런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의한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리스도인되게 우리를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조금의 체질 개선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절망적 상황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아무런 공로 없지만, 아니 자격조차 완벽하게 미달이었지만 창세 전에 예정된 구원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극적 전환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포이에마 크리스챤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지위와 함께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는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은혜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포이에마 크리스챤으로서 매일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아가도록 하신 부르심에 성실하게 응답하며 살아가십시오. 그 길은 홀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우리를 다루어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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