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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영생으로 가는 길: 마 19장 16-30절

by 최수근 2023. 9. 10.

2023년 9월 10일 주일예배

[영생으로 가는 길: 1916-3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가치가 부여되기를 바라곤 합니다. 자기 행동을 인정받고 싶은 거죠.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호감 느낄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이와 같은 심리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들을 포함해서 유대인들은 자기의 공로나 선행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구제에도 힘썼습니다. 동남아시아의 불교권에서도 보면 선행을 통해 그들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인간들의 내면에는 이런 흐름이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이 결코 천국을 담보하는 길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다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길을 한 청년과의 대화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주변의 부러움을 살 만큼 부자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들이 누리기 어려운 사회적인 지위도 얻었습니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율법대로 살려고 애를 썼던 신실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율법을 지켰지만,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확실한 길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혹시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예수님께 묻기로 작정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수님께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19:16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청년이 던진 질문을 보면 그는 자기의 행동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을 거로 생각했고, 그렇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만 그럴 결과를 얻을 수 있을 지를 예수님께 여쭤본 겁니다.

느닷없이 튀어나와 무릎 꿇고 이야기하는 청년을 예수님은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셨습니다. 19:17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 땅의 영역에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할 선한 일은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는 말씀은 청년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묻습니다. “어느 계명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19:18-19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들은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습니다. 평생 이 계명들을 지키며 살아왔던 청년이기에 신이 나서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이 모든 것을 내가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런 그를 예수님은 흐뭇하게 바라보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청년을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예수님은 그가 지금까지 지킨 것들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켰던 것으로 만족해하는 청년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너에겐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상당히 율법에 신실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지만 단지 신실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한 가지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계명들을 알고 그것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만으론 영생이 보장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부족한 한 가지가 있다는 지적에 청년은 잠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말씀하신 율법들을 정말 잘 지켜왔는데 뭐가 부족한 거지? 더 이상의 계명은 없는데라고 생각하고 있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9:21 “네가 온전 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청년에게 그의 많은 소유를 포기하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전혀 예상 밖에 예수님의 요청에 당혹스러웠습니다. 그저 나를 따르라하시지 굳이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청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요청은 결코 그에게 수용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는 예수님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힘없이 돌아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이 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 청년에게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 그의 많은 재물은 결정적인 방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요청 앞에 서게 될 때 본능적으로 자신이 얻게 되는 유익이 무엇인지 또는 잃어버릴 것이 무엇인지 따져보게 됩니다. 손해라고 여겨지면 앞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뒤돌아서서 가는 청년을 측은하게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9: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이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예수님은 그림으로 선명하게 그려주셨습니다.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바늘귀가 얼마나 작습니까? 눈이 어른거려서 실을 끼우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실은 불가능하다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부자라는 이유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는 한 하나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의 지배를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여기에서 과장법을 쓰셨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폭탄과도 같은 선언은 충격과 당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매우 놀라워하면서도 궁금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도 물질적인 부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가난은 악의 대가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일이 불가능해짐을 보면서 재물과 구원에 대한 제자들의 통념이 깨어졌습니다. 제자들이 몹시 놀라 하며 웅성거렸습니다. 19: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그렇게 의아해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의 일은 우리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 영역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자신이 무언가를 행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원했기에 예수님은 청년에게 영생을 위한 새로운 의무를 행하도록 안겨주신 것입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그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요청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걸 보면 그가 어려서부터 열심히 율법에 순종했다고 하지만 이 순종은 상투적인 관습에 젖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성이 그 속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실하다고 자신을 여기지만 결국 하나님을 위한 신실함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가는 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뿐입니다.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주는 것을 받아먹습니다. 자기가 일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절대 의존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아이들의 이와 같은 속성을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2: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 점에서 청년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삶의 최고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그가 소유한 물질 앞에서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영생을 얻는 길이 내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뒤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물질이 그의 마음을 이미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청년에게 부족한 것은 자기 것을 다 내려놓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있어야 합니다.

옆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가 재빨리 자기들은 그 일을 정확하게 행하였노라고 예수님께 상기시켜주었습니다. 19:27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아마도 그의 속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 청년은 재물을 버리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지 못했지만, 우리는 저 청년과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부자 청년을 바라보면서, 자기 것을 버리지 못한 그가 영생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자기들이야말로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지 않게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말을 잘 들어보면 제자들을 처음 부르셨을 때 그물과 배, 부친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은 것도 진정한 포기와 헌신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저 보상심리만 담겨 있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으니, 주님이 새로운 왕국을 세울 때 높은 위치를 달라고 보상을 기대하면서, 자신들이 포기한 소유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자들 역시 그 부자 청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어떤 보상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이 가시는 길을 끝까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읽은 예수님은 그들의 보상에 대한 기대에 대해 물론 그렇다고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심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19: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다른 하나는 영생의 상속입니다.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여러 배에다가 영생의 상속, 그것은 대단한 보상입니다.

하지만 마가복음 10장에서 보면 이 말씀에 달갑지 않은 선물이 하나가 더 붙어 있었습니다. 보상을 백배나 받기는 하는데 막 10:30 “박해를 겸하여 받고라고 했습니다. 복만 주시면 되지 왜 거기에 기어코 박해받는다고 하셨을까요? 게다가 베드로와 제자들이 살아있는 동안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정말 백배나 받았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제자들이 받은 것은 고난뿐이었고 죽음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쫓았을 때 얻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영화가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보상을 바라고 포기하는 척하는 자들이 아니라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보상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핍박과 함께 주어질 것이고, 내세에 영생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백배의 은혜보다는 박해의 피해로 인한 어려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라는 베드로의 말에 은혜와 고통도 수반될 것을 말씀하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누구보다 더 많이 받을 것이다라는 베드로의 기대 속에서 베드로의 자기 공로와 우월감, 교만의 생각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무서운 생각을 깨뜨리셔야만 했습니다. 가뜩이나 배타적이고 특권의식을 갖고 있던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생각이 자리할 위험이 다분합니다.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들이 서로 내가 먼저라고 하는 우월적인 생각을 갖기 쉽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길을 거닐면서도 누가 큰지 서로 설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누가 먼저냐 하는 것은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하나님이 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우리의 기준과는 분명 다르십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는 어떤 동기에서 시작되었는지, 언어와 행동 등에서 드러나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세한 부분까지 다 살펴보실 것입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여 비록 순서를 세웠지만, 먼저와 나중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언제고 뒤바뀔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종말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과 보상은 우리의 기대치를 다 무너뜨릴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쭐해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해서 그들의 위험성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복종과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성취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완성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가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을 절대 의존할 것을 예수님은 요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우리가 진정 이 땅의 것들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하게 제자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형적인 그물과 배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열두 제자들은 재물에 발목이 잡혀 제자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간 부자를 빗대어 자신들의 공로를 인정받고 싶은 기대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물질과 명예, 욕망을 접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의 길에 들어선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 행동에 대해 칭찬과 보상을 기대하고 나간다면 그것은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기대치 만족을 추구하는 외형적인 제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도록 유혹합니다. 지금은 제자훈련 과정을 무사히 끝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기대치를 버리고 옛것을 아쉬워하지 않는 진실한 제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요구는 오늘날 물질주의적인 가치를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 급진적인 메시지이고, 수용하기 힘든 불편한 요구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순종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 만이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바깥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가 될 때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함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바깥에서 궁극적으로 쓸모없는 것들에 매달리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것은 가치 있는 유일한 생명을 상실하는 지름길입니다. 그 어리석은 행동에 종지부를 찍고, 즉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늘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따라가는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때, 비록 거기엔 고난과 불편함도 따르겠지만 영생에 이르는 기쁨을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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