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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마 18장 15-20절

by 최수근 2023. 9. 10.

2023년 8월 27일 주일예배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1815-2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완벽한 이는 없습니다. 작든 크든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그 실수 때문에 정당하게든 부당하게든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비난이 비난으로 그치는 일이 자자하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살리려는 데 초점이 있지 않고 깔아뭉개려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자기의 실수 혹은 죄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완악한 이들도 많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비난하고 부인하고 지루한 공방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선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허물만을 붙잡고 서로를 욕하고 비난하고 부인하기 바쁜데 어떻게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역사적인 올바른 청산과 그에 근거한 분명한 책임을 부과해 본 적이 없어서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교회는 이렇게 반복되고 있는 세상의 패턴에서 자유 할까요?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버립니다. 그게 마치 핍박을 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도 부족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에 지체들의 실수와 다른 이들의 삶에 해를 끼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런 일로 교회 안에 비난과 수군거림이 넘쳐나기도 하고 교회공동체 안에 지체들이 많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거룩한 신앙공동체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와 성도가 힘을 잃어버리는 것은 이와 같은 어려움에 직면해서 이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며, 어떤 결론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데서 길을 잃어버렸기에 생기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그냥 슬쩍 덮고 넘어간다고 해서 그 일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함으로부터 나오는 힘을 차단해버리고, 그로 인해 생명 공동체가 아닌 죽은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 어떻게 빛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불이 꺼졌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 낮은 자의 환대에 이어 교회공동체를 거룩한 생명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하시면서 지체 가운데 한 사람이 우리 중 한 사람에게 죄를 범한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이건 공동체에 해를 입히는 죄일 수도 있고, 한 개인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신공격인지, 어떤 행동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한 신앙 안에 있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어긋난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일들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한 제가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과 다른 성도들과의 순결한 교제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큰 위험입니다. 이 위험을 방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과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것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할 때입니다. 그것을 옆에서 도와야 합니다. 이 과정을 예수님은 3단계로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그에게 가서 권고를 은밀하게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의 죄가 불필요하게 알려지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의 죄를 인지하였거나 혹은 피해 당사자가 직접 가서 그에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세상은 이와 같은 문제 해결을 물리적이거나 또는 법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상대를 끌어내리고 복수 혹은 보상받기 위한 솔루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를 끊어내기보다는 형제를 얻는 방법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의도된 목표는 화목입니다. 형제나 자매가 훈육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얻는 목표를 이룬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그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즉시 가지 않고 있으면 사실과는 달리 감정의 골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문제의 원인 앞에 서기를 두려워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이를 대면하는 것 자체가 싫을 뿐만 아니라 힘이 드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말고 그 사람과 만나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만일 들을 귀가 있어 그가 행했던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면 우리는 형제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들으면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가려 한다면 언제나 관계는 파괴되고 꼬여버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입장이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권고하는 이에 대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성도의 교제와 우리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절대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지금 이 사회도 건강함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대일 만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그가 듣지 않을 때, 예수님은 그 절차를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다음 단계로 나갈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공동체의 두세 명의 구성원 앞에서 앞의 과정을 반복하는 일입니다.

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이것은 신명기에서도 제공하는 지침입니다.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그렇지만 신명기에서 증인은 행위 자체의 증인인데, 16절에서는 책망과 회개의 호소를 목격하기 위한 증인들이고, 죄를 지은 이가 권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바르게 응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그의 고집에 대한 증인들이라고 봅니다.

지금의 상황을 일대일로만 풀어가려고 하면 객관적으로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감정대립으로 잘잘못을 떠나 문제가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어서입니다. 그러기에 증인이 될 수 있는 이들을 세워서 사실확인을 해야 합니다. 두세 증인을 통해 상황을 객관화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욥의 세 친구처럼 정죄하기에 바쁜 사람들이라면 문제는 더욱 꼬이고 말겁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도 끝까지 듣지 않으면 예수님은 교회에 그 문제를 공론화하도록 하셨습니다. 결국은 듣지 않으면 징계로 인한 공동체에서의 출교를 염두에 두신 겁니다.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일대일에서 일대 소수, 그리고 교회 안에 공론화의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죄를 범한 사람이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고, 공동체 안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듣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했습니다. 공동체에서의 출교인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배척과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사람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긴급성을 요하는 불신자로 공동체는 여기게 되는 겁니다.

누군가를 책망하고 권고할 때, 그 사람이 우리의 말에 동의하기를 바랄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그에게 바라는 것은 그가 듣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말은 여기 본문에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15, 16, 17)우리는 그가 우리의 말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관련된 것처럼 냉정하게 그 권고를 검토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만약 다툼에 관련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면 문제는 신속히 해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전혀 듣지 않으면 교회의 권위 아래 그는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게 출교인 거죠. 공동체의 질서와 거룩한 세움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권위를 교회에 주셨습니다.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교회는 빗나간 제자들의 죄를 용서하거나 교회의 교제에서 출교를 선언할 수 있는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권위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물론 그 권위를 부여받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 된 이들이기에 무엇보다도 이 과정을 시시비비를 따지기 위한 법적 절차로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기도가 더해져야 하는 거죠. 세상 법정과는 달리 예수님은 이 일을 기도로 준비하고 진행하기를 명하셨습니다.

18:19a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교회공동체에서의 권고와 징계는 사람의 뜻과 의지, 감정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어야 하기에 먼저 하나님의 기준을 이해하고, 이를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로 이끄는 성령과의 일치를 추구하고,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임재하심의 인도를 따라가기 위해 기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공동체의 영적 책임입니다. 이런 불일치들은 단순히 인간의 실패와 오해가 아니라 대부분은 영적 전투일 때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단지 골칫거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인이요 제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에게 가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긍휼, 정결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싸움닭이 아닌 화목과 평안을 위해 나아가고자 한다면 교회공동체와 지체들의 기도 지원은 필수이고, 그와 같은 기도의 결실을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응답받는다는 포괄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화해와 권고 그로 인한 회개를 위해 드려지는 기도를 이루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권징을 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일치된 기도가 필요합니다. 두 사람 이상의 합치된 의견과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일들이 전제될 때 비로소 교회의 권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위 있게 시행될 수 있고 그 사람이나 교회를 살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이거나 주관적, 혹은 극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막는 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기도할 때 이 모든 것을 관장해 가시는 주님의 주권 앞에 우리가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 일을 우리가 주님과 함께 수행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9: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도 그들 한가운데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왜 중요합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에 임재하심은 아버지의 뜻에 확고하게 헌신한 예수를 본받아 아버지의 뜻을 끊임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영적 전쟁은 우리 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함께하셔야만 합니다.

이 일에서 교회공동체는 지체 서로 간에 죄 된 행동을 유발하는 이로부터 공동체의 평안과 순결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죄와 싸우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는 일이 때로는 더 쉬울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안에서 절대적인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하기가 쉽습니다. “나도 완전치 않은데 누구를 판단하겠어라는 말도 자주 또 다른 지침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위한 용기 있는 관심은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의 곤경과 그 위험을 돌아보게 되고, 죄로 인해 공동체의 순결이 영향받지 않도록 방어막을 쳐주는 힘이 될 것입니다.

물론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징계는 인기 있는 주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죄와 그 죄에 빠진 이들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모른 척하거나 방치하는 지배적인 형태에 도전해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는 카페테리아 형태에서 한 교회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다른 교회의 몸으로 그냥 가도록 허락하기가 때로는 더 쉽습니다. 교회 간에 상호적인 책임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와 자매들에 대한 징계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때 우리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 임재의 신실한 증거가 있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물론 그 목표가 징계나 벌에 단순히 있지 않음을 항상 유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징계의 의도된 목표는 죄를 범한 형제나 자매들을 순결의 상태로 되돌리고 지체 내에서 평강의 교제를 다시 나눌 수 있게 하는 데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의 목표는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하여 말로 꾸짖거나 그들을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뉘우치고 공동체에 복귀하기를 바람으로써 죄를 저지르게 된 문제에 대하여 환기를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건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얻는 일입니다. 그와 함께 이 일을 통해 언제나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이와 같은 기도와 노력에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손을 떠나 하나님께서 다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해야 할 단계에 성실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교회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고 결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힘을 잃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교회공동체요 제자가 될 수 있겠어요. 우리는 지금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거룩함과 순결을 되찾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또한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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