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설교동영상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마 20장 1-16절

by 최수근 2023. 9. 17.

2023년 9월 17일 주일예배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마 20장 1-16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요즘 공정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정은 어떤 의미일까요? 대부분은 인과율적 법칙에 따른 공정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받지 않는 것이 공정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이런 논리들은 소위 능력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원리들입니다. 힘없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각지대에 서 있는 이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회 안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람들의 공정은 자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타자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그럴싸한 가치들로 포장하고 있지만 모든 이들의 공정을 위한 목소리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는 적습니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공정이라는 가치는 어떤 모습일까요? 능력에 따른 서열이 맺어지고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욱더 힘들어지는 세상이라면 하나님 나라와 너무 멀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자 청년이 자기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자기들에게 과연 어떤 보상이 주어질 것인지를 예수님께 질문했었습니다. 굉장한 기대를 했겠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보상받을 목적과 개인적인 특출함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은 제자들의 동기 중 가장 저급한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19장 끝에서 하셨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걸까요? 제자들은 자기들이 먼저 된 것은 그들의 능력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으로 주어졌다는 바로 그 포인트, 은혜의 포인트를 놓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 가운데 있고, 천국 백성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가치와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체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면서 그와 같은 가치 전도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셨기에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셨습니다.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보통은 새벽 인력시장에 그 집의 집사를 보낼 텐데 포도원 주인은 특별하게도 직접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구하기 위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이들이 나와 하루 품삯을 위해 일할 주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몇 명의 품꾼이 주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품꾼을 구하고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뒤에 일하도록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20: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 삼시, 즉 오전 9시에도 장터로 나갔습니다. 가서 보니 아직도 장터에서 일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도록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오전 6시에 일꾼을 구할 때처럼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고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약속합니다. 주인이 일한 만큼 주리라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20: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재미있는 것은 주인이 정오와 오후 3시에도 장터에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또 나가보니 장터에서 아직도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들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심지어는 오후 5시에도 나갔습니다. 거기에는 거의 하루 종일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날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인데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으니 그들의 가족들은 굶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주인이 물었습니다. 20:6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장터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힘없이 말합니다. 20: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주인이 말한 것처럼 이들이 그냥 일하기 싫어서 놀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었지만 누구에게도 택함을 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게으름이나 부족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일거리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 때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가도록 채용했습니다. 그렇지만 품삯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후 5시면 일이 다 끝나가는 시점입니다. 겨우 한 시간 일할 시간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을 위해 어떻게든 일해야 했기에 한 시간이라도 일을 하기 위해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이들은 일한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고 아마도 하루 품삯의 작은 부분만을 받게 될 거로 생각하며 일했을 겁니다.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나았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오후 5시에 나가서도 또 품꾼을 불러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고용주들이 넘쳐난다면 세상은 달라지겠지요?

그렇게 포도원 주인은 한 번에 품꾼을 모으지 않고 3시간 어간으로 장터로 나가 일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찾아 자기 포도원으로 들여보냈던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인에게서 관대함과 긍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인의 진짜 관심은 그대로 놓아두면 끼니를 거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찾으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관대함과 긍휼을 보게 됩니다.

오후 6시가 되어 하루의 노동이 마무리되고 이젠 품꾼들이 품삯을 받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명령합니다. 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아마도 일이 다 끝나가는 시점에 불리어 온 사람들에게 주인이 얼마나 품삯을 줄 것인지는 모두의 관심거리였을 것입니다. 오전 6시에 일하러 들어온 사람들은 한 데나리온이라는 분명한 액수를 약속받았지만, 이후에 온 사람들의 액수는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후 5시에 온 자들은 그저 조금이라도 일한 것에 감사하며 청지기 앞에 섰을 겁니다. 그런데 너무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이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겁니다. 겨우 한 시간 일했는데 말입니다.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함께 일한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곧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1시간 일했는데 한 데나리온이라면 먼저 온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품삯을 받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도, 정오도, 오전 9시도, 심지어 오전 6시에 처음부터 일했던 사람들도 모두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건 충격이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두 시간 일한 사람이 동일한 임금을 받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 받을 줄 알았던 이들의 기대가 무너지자 바로 사람들의 입에서 포도원 주인을 원망하는 말들이 튀어나왔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원망하며 말하였습니다. 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이들과 하루 종일 수고한 자기들과 같게 여긴 것은 참으로 부당하다는 불평이었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처사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어떻게 오전 6시에 와서 죽도록 일한 사람과 겨우 한 시간 일 한 사람을 동등하게 취급할 수 있습니까? 이건 부당한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가산점도 주지 않는 이 상황을 불공정하게 여겼습니다. 이게 우리의 일이라면 우리도 당연히 어필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관점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불평하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20:13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인 또한 법적으로 전혀 잘못은 없습니다. 처음에 온 자들과 한 계약한 대로 약속을 지켰습니다. 다만 주인이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는 노동 시간을 계산하지 않고 그냥 하루 품삯을 다 주었다는 점입니다. 이게 먼저 온 자들에게는 차별이었고 부당함이었던 거죠. 주인이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약속 이상을 베풀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주인의 관대함이 자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은 것이 불만의 이유였습니다. 그 점에서 품꾼의 공정과 주인의 공정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포도원 주인이 그에게 말합니다.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포도원 주인의 약속과 관대함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먼저 온 자들이 놓친 것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들은 자신들이 일할 수 있었고,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품삯을 받을 수 있었던 것에 먼저 감사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주인은 늦은 시각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도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관대함을 베풀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먼저 온 자들은 간신히 한 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었던 은혜를 입은 자들을 축하해 주기보다는 시기함으로써 주인이 불공평하게 자기들을 대했다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주인의 관대함과 다른 품꾼들이 얻은 행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 자들을 향해 포도원 주인은 말합니다.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 입장에서는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로 삼은 자들은 이 상황을 부당하게 받아들인 먼저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들과의 약속을 지켰고 그들에게 정당하게 행했습니다. 임금을 같게 나누어 준 것은 주인의 몫이고 자유입니다. 주인은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썼을 뿐입니다. 그런 주인의 권한을 자신들의 계산과 기대에 따라 이리저리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월권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주인은 먼저 온 자들의 불만을 단번에 잘랐습니다.

이 비유는 주인의 공정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주의가 필요합니다. 품꾼들이 생각하는 공정과 주인의 공정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처사를 품꾼들은 부당하다고 여겼지만, 주인은 품꾼들의 노동 시간과 환경에 관계없이 그들에게 주인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을 공정으로 여겼습니다.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품꾼들의 공정에는 인과율적 이해가 작동합니다.

반면에 자신의 것으로 자신의 포도원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루를 살아갈 필요를 채워주려는 주인의 공정에는 자유에 근거한 새로운 법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적용하는 것은 품꾼들에게 익숙한 인과율적 법칙이 아니라, 주인의 은혜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 법칙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은혜를 사용하는 자유를 누립니다. 이는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방책입니다. 주인의 포도원에는 하루의 먹거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보상에 대한 질의를 했던 제자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 있는 그들을 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많이 일했으니 많이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많이 일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전적으로 그들의 능력에 따른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오히려 나중에 온 사람 중에 더 나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 생각하면 선택되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렇게 은혜 안에 서 있기에 언제든 먼저 된 자가 나중도 될 수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은 누구든지 첫째일 수 있고 누구든지 꼴찌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꼴찌로 정해진 사람도, 첫째로 정해진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똑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이 원리를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은혜가 아닌 인과율이라는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런 시각으론 결코 감사하며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특혜가 있는 대우와 보상을 원하는 신앙인이 되고 말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시겠지요.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모든 것을 버린 것 안에 들어 있는 공로와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주장 안에 들어 있는 보상 심리는 천국과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나중 온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먼저 되고, 먼저 온 사람들이 나중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과 달리 베드로와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갖고 있었던 모든 것을 먼저 포기했을지라도 예수님은 모든 참된 제자들을 같은 일을 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제자들이 무언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관여하심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에 구원받았고, 하나님 나라를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입을 다물고 오직 감사하므로 섬겨야 합니다. 단지 자신들을 찾아내서 용납하신 예상치 못한 사랑에 반응하는 자만이 높은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우리가 봉사의 시간, 노력, 헌신으로 인해 마땅히 어떤 것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행한 참된 가치를 무효로 만들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동기는 세상의 주요한 가치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오늘 그것을 바꾸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것, 희생한 것으로 우리의 가치를 측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보상을 얻어야 하는 것이 주된 동기가 된다면 그것은 시기, 비교, 자아 도모 그리고 경쟁을 파생시킴으로써 우리의 연합을 깨뜨려 버릴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지적한 것처럼 보상을 생각하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정당함을 의심하고 다른 제자들을 시기하게 만들 것입니다.

주인의 은혜를 자신들의 능력으로 환원한 먼저 온 자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평가절하된 이 상황을 부당하게 여겼습니다. 일을 적게 한 사람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들에게 베풀어질 때는 당연하던 주인의 은혜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질 때 주인의 관대한 은혜는 불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이 누군가에게 손해가 되는 일인가요? 먼저 온 사람을 비롯해 누구에게도 아무런 손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부당한 일로 여기는 순간 그 속에서 시기가 움트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우리는 시기로 가장된 공정, 정당함이나 보상이 아닌 감사가 가장 고귀한 동기부여가 되어야 함을 봅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천국으로 부름을 받고, 보상의 약속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특권이 부여되었습니다. 우리가 천국으로 부름을 받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을 생각하며 우리의 특권을 적절하게 존중할 때, 우리의 마음에서는 감사가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동기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행하신 전적인 은혜의 사건에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정하심, 관대함이 기반 된 공정은 하나님 나라에서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새로운 가치입니다. 모든 인간의 공로는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 앞에서 시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하루 한 데나리온이라는 돈을 받을 자격이 똑같이 없습니다. 단지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관대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받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제자들, 어부들, 그리고 세리들은 그들 자체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하나님께 환영을 받습니다. 천국에 구성원이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인적인 자만, 경멸 또는 질투를 내세울 여지 또한 없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이 관대하신 하나님이 전혀 자격이 없는 자들을 대하시는 방법에 의문을 제기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참으로 관대하신 분이십니다. 한 시간만 일한 노동자들이 그 시간에 대한 삯만 받게 된다면 저녁 식사를 준비할 돈이 없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관대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십니다. 누가 그것에 대해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이 가치가 공유될 때 우리는 타인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 타인의 이익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본다는 얕은 생각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하루하루 지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쓸쓸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먹고 쉴 수 있는 세상을 꿈꿀 수 있습니다.

이는 오직 이 땅의 주인이신 관대하시고 공정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세상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연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