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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용서와 분노: 마 18장 21-35절

by 최수근 2023. 9. 10.

2023년 9월 3일 주일예배

[용서와 분노: 1821-35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우리 사회는 무한 경쟁에 빠져 있습니다. 심각한 경쟁은 사람들에게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더 심화시키고, 이 경쟁에 탈락한 사람 중에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회를 향해 보복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특정한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사람들 대화에서 용서 못 해” “용서할 수 없어란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자기처럼 상처받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의 풍조 속에서 교회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세상과는 다르게 경쟁과 성공주의, 개인주의, 분노와 같은 파괴적인 요소들로부터 멀리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고, 작은 자들을 환대하고, 자기와는 다른 이들을 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된 공동체로서 충실하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 같은 행동들을 실천하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 첫 번째가 낮아짐이었고, 두 번째가 낮은 자에 대한 환대였습니다.

세 번째로 오늘의 주제는 베드로의 관심과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18:21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죠. 자기에게 잘못된 행동을 한 이를 용서해주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그 일을 반복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잘못된 패턴에 빠졌다면 무한정 용서해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한계치에 이르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처단해야지요. 여기에서 베드로는 더는 상대를 용서하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었던 겁니다.

유대 사회는 이런 경우에 용서는 세 번으로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받을 수 있으나 네 번째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규정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사회적인 통념의 수준을 넘어서는 관대한 기준을 제시했으니 은근히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기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치를 제시하셨습니다.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숫자적인 개념으로 하면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인데, 실은 무수하게,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수를 세지 말고 그냥 용서해주라는 겁니다. 이게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천국은 마치 종들과 결산하는 왕과 같다며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결산이 진행되는 가운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 종이 왕 앞에 끌려오게 됩니다. 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그 종은 왕에게 만 달란트나 빚지고 있었습니다. 만 달란트라는 빚은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입니다. 그 당시에 한 국가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채무였던 겁니다. 그가 이렇게 엄청난 빚을 무엇 때문에 지게 되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만 달란트라는 수치를 통해 개인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채무임을 이야기하신 겁니다.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갚을 돈이 전혀 없기에 빚을 갚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왕이 명합니다.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처분한다고 해도 얼마나 되겠습니까? 만 달란트를 도저히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건 어차피 돈을 다 회수하지는 못하니 그 사람은 물론 자식들까지도 노예로 만드는 징벌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진 것에 대한 책임추궁입니다.

다급해진 종이 엎드려 절하며 간청하였습니다. 18:26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아니 그 돈을 어떻게 갚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오히려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여전히 허세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비참한 곤경이 왕의 동정심을 샀던 겁니다.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주인이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종의 엄청난 빚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이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결코 아닙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고 했지만,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이 일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왜 불쌍히 여겼는지는 밝히지 않으셨어요. 그냥 주인의 마음에 종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난 겁니다. 이 용서에는 아무런 전제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신 겁니다. 천국은 마치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임금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고, 종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큰 부채, 즉 죄라는 빚을 짊어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종을 불쌍히 여겼던 임금처럼 죄의 빚에 눌려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임금과 종의 관계에서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용서의 사건이 일어난 거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큰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던 겁니다. 실은 우리에게서 그럴만한 가치와 행동이 전혀 뒷받침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들의 상태가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김 받았음을 로마서는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10a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아무 자격도 없고, 또한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전적으로 용서하시고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큰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기독교의 참 신앙과 삶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다함 없는 사랑이 자기 인생 속에서 실질적으로 경험되어졌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다는 진실을 알고, 삶으로 자신들이 입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입증해 보이는 죄인들만을 위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용서라는 귀중한 선물을 우리 손에 들려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였다고 고백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선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탕감받고 그 자리를 벗어난 종이 얼마나 마음이 가벼웠겠습니까? 빚의 무게에 짓눌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던 종은 날아갈 듯 뛰어갔을 것입니다. 그 순간만은 자기도 모든 것을 다 용서해줄 수 있을 거라고 마음먹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잠시 뒤에 너무도 빠르게 분노로 바뀌고 맙니다.

은혜를 입고 그 자리에서 나온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그 당시 3개월 월급 분량의 돈입니다. 이것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빚을 탕감받고 나왔으니 종은 그 동료를 기분 좋게 용서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사람이기를 포기합니다. 그의 멱살을 잡고 그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였습니다.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용서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가 간청합니다. 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이건 자기가 임금에게 했던 행동이었고 말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서도 그는 고민한 흔적이 없어 보입니다. 양심은 사라지고, 오직 탐욕과 이기심만이 작동하였습니다. 저는 이 종의 마음에서 요즘 세대의 강퍅함을 봅니다. 마음 아프게도 우리는 용서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극단적 이기주의, 환대가 아닌 냉대, 분노와 보복이 판치는 세상 말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은 자신이 용서받은 기쁨을 나누지 못하고,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간청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렸습니다.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분노하여 알량한 자기 빚을 갚도록 동료를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옥에 가두면 어떻게 빚을 갚습니까? 악랄한 행동입니다. 그토록 많이 용서받은 자가 같은 연민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극악하게 행동하니, 옆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동료들이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자기 주인에게 가서 소상히 이 일을 알렸습니다. 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 이야기를 들은 주인이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즉시 주인이 그를 불러드려 호통을 칩니다. 18:32-33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그는 악한 종이라고 규정되면서 왕 앞에 서야 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주었던 것처럼 마땅히 동료에게도 그렇게 대했어야 함에도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이 종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요? 왜 자기가 입은 은혜를 생각하지 못한 걸까요?

이에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악한 종을 옥졸들에게 넘겼습니다. 그는 빚을 결코 갚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거기에서 놓여나올 수 없는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사랑의 선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형제에 대한 분노로 움켜쥐고 있던 손을 그분 앞에 펴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은 자의 진정성입니다. 그럴 때 참으로 우리 또한 은혜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였음에도 그 은혜 안에 서 있지 못하고 여전히 분노로 점철되어 있다면 천국의 좁은 문을 결코 지날 수 없습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분노는 사람들을 사로잡고 죄의 노예로 만듭니다. 그것은 치명적입니다. 우리가 만약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은혜와 용서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용서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겨야 하고 그것을 삶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우리의 심장을 더욱더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매일의 삶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저히 우리는 갚을 능력이 없지만 아들의 생명으로 대속하사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 사랑 앞에 매일 매 순간 서 있다면, 내게 상처를 준 이들에게 그 상처 갚아주겠다고 덤벼드는 호기를 부리는 일은 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 사람이 내게 한 짓을 용서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면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6: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큰 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주께서 용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은혜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이 은혜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분노와 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충만했던 우리 안에 거룩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은 그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거죠. 받은 용서가 마음에 새겨질 때 우리는 진정 형제의 허물을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비는 마땅히 그래져야 할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는 마땅히 받지 못할 사람에게 그냥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나타내는 중심적인 원리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누리고 있다면 용서하는 일을 힘쓰고 주님의 관용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제자의 삶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은 말의 증거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마침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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